대만, 새로움을 발견하다
대만에 도착한 둘째 날에, 가장 큰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됐다. 당장 지낼 곳과, 앞으로 지낼 곳을 얻을 방법을. 단 5분간의 대화로 말이다. 이전에 몇 년 동안 쌓아온 경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었고,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아직도 아주 많이 남아 있었지만, 이 여정을 시작하는 데 충분한 성과였다. 최소한 몇 주정도 지내면서 뭐라도 해 볼 시간은 벌어놓은 거니까. 일단 숙소를 그렇게 정리하고 나서는 긴장이 조금 풀려서 조금은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됐다. 낮잠도 충분히 자서 움직일 기운도 충분했고. 내가 대만에 오기 며칠 전, 내가 일하던 호스텔에 놀러 왔었던 대만 친구 Sunny에게 문자를 보낸 것도 그래서였다. “나 지금 어디게?”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음.. 당연히 제주겠지. 아냐?” “음, 제주는 아니고 시먼딩이란 곳인데,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겠네. 대만이라나?” 그랬더니 답장이 이렇게 온다 “Really ???????!!!!!”(진짜 이렇게 왔다) 마침 그날 시간이 난대서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곳은 Zongxiao Fuxing 역에 있는 백화점. 꽃보다 할배 방송을 통해 유명해진 만두집 딘타이펑이었다. 사실 대만이란 나라에 오게 된 이유도 꽃할배에 꽂혔기 때문이었는데, 그 방송에 나온 식당(지점은 다르다. 방송에 나온 곳은 101 빌딩 지하, Zongxiao Fuxing 역은 본점)에서 밥을 먹게 되다니! 꿈꿔왔던 소원들을 하나씩 이뤄가는 느낌이었다.
그 날 아침을 배불리 먹은 탓인지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배가 많이 고프진 않았다. 먹기 애매하기도 하고, 저녁에 비싼 거 먹어야 하니 돈도 좀 아낄 겸 점심은 가볍게 스킵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침대에 엽서를 펼쳐놓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수량을 다시 파악하고 상태를 점검하고. “엽서를 팔아 여행을 지속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준비였다. 남은 엽서는 정확히 32세트. 그리고는 계산기를 두드려 봤다. 월말에 들어올 돈이 30만 원쯤 있고(4월 일주일치 월급), 있는 엽서를 다 팔면 약 20만 원이니 만들 수 있는 돈은 50만 원쯤 됐다. 거기에 만약 여행을 계속하기로 결정한다면 예매해 놓은 귀국행 비행기표를 환불받을 수 있으니, 보너스로 15만 원정도는 더 끌어올 수 있었다. 약간의 여유는 있었지만, 가능한 한 빨리 있는 돈으로 대만 엽서를 위한 사진을 찍고 뽑아내야만 했다. 그래야 지속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잠깐의 복잡한 계산을 뒤로하고, 저녁 식사를 위해 길을 나섰다. 내가 있는 곳은 시먼(西門) 역. 가야 할 곳은 종샤오 푸싱(忠孝復興) 역. 지하철로 약 15분 거리였다. 시내 번화가의 느낌은 한국과는 조금 달랐지만, 지하철 역의 분위기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슷했다. 저녁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지하철엔 사람이 꽤나 많았다. 한동안 조금은 여유로운 제주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러시아워에 지하철을 타고 있으니 서울에 돌아온 듯한 느낌도 들었다. 지하철은 2-3분에 한 대씩. 타이페이는 서울에 비하면 꽤나 작은 도시라 배차간격이 짧은 듯했다. 종점 간의 거리도 그렇게 멀지 않다. 노선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한 시간 내외. 아, 그리고 가장 신기하고 괜찮은 시스템은 환승역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서울 지하철은 환승역이라도 한 플랫폼엔 한 가지 노선만 들어오는 반면, 타이페이 지하철엔 한 플랫폼에 서로 다른 두 노선이 들어온다. 그래서 가는 방향과 전철 들어오는 시간만 잘 맞는다면, 내리자마자 반대편에서 다른 노선으로 갈아탈 수 있다. 환승시간이 0에 수렴하는 셈. 반대 방향이라면 한 층을 내려가거나 올라가서 타면 된다.
지하철을 타고 어딜 나간다 하면 이동시간 30분 정도는 기본으로 깔고 가는 서울 생활에 익숙해서인지, 15분이란 시간은 참 짧았다. 영어 안내문과 방송도 참 잘 정비되어 있어서 길을 찾기도 어렵지 않았다. 만나기로 한 곳은 2번 출구. Sunny는 에스컬레이터에 바로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놀라는 Sunny. 제주에서 체크아웃을 할 때 나중에 보자고 얘기해 놓고 일주일도 안 돼서 다시 만났으니, 그럴 법도 하다. 식당은 지하 1층 식당가에 있었다. 워낙 유명한 곳이고, 주말이 가까워 온 목요일 저녁이라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기번호를 받고 미리 주문을 했다. 대만식 만두(샤오룽 바오) 두어 가지와 새우볶음밥. 맛? 정말 괜찮았다. 주방을 통유리로 오픈시켜버리는 자신감과 점원들의 친절한 서비스도 참 좋았다. 아, 꽃할배 방송 이후로 한국 손님들이 꽤나 많이 온단다. Sunny가 점원에게 북경어로 몇 마디 하니(이땐 북경어를 거의 몰랐지만 나를 지칭하며 한궈런이라는 단어를 쓴 건 찰떡같이 집어냈다) 내게 한국말로 인사를 건넨다. 대만에 도착한 이후에 처음으로 즐긴 제대로 된 식사였다. 앞으로 이런 호사를 누릴 기회가 거의 없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시간을 충분히 즐기기로 했다. Sunny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필요한 정보들을 꽤나 많이 얻었다. 유명한 관광지며, 교통편이며, 대만 사람들만 아는 팁 말이다. 얼마 전엔 내가 주인이고 Sunny가 손님이었는데, 이젠 내가 손님이 됐다. 지구촌 스케일의 주객전도랄까. Sunny는 제주에 있을 때 내게 받았던 도움들을 그대로 다시 내게 돌려주고 있었다. 그때 Sunny를 이래저래 많이 도와줬던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사실 100% 개인적인 친절이 아니라 업무가 반쯤 섞여있는(물론, 진심이 베이스에 깔려 있는) 친절이었지만, 그마저도 개인적인 도움으로 받아들여 준 Sunny가 참 고마웠다.
식사를 마치니 8시 반쯤. Sunny는 대만에 오면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며 101 빌딩이 보이는 근처의 공원(국부기념관)으로 날 데리고 갔다. 대만 국민당의 초대 총통인 쑨원(쑨원에 대해선 대만 사회에서 역사적 평가가 꽤나 많이 갈리는 편이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곳이다. 보도블럭으로 깔끔하게 마감된 넓은 공터와 커다란 처마를 자랑하는 대만식 건물(중화권 스타일)이 나를 기다렸다. 한가롭게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 여럿이 모여 춤 연습을 하는 대학생들, 벤치에 앉아 알콩달콩 대화를 나누는 커플들. 대만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람을 기리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는 공원인데도 한강시민공원이나 동네 근린공원의 분위기로 개방되어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기념관 건물과, 입구 오른편에 화단으로 꾸며 놓은 조그만 정사각형 공간에 위치한 쑨원의 석상이 아니었다면 그를 기리기 위한 공원이라는 것도 모르고 지나칠 것 같았다. 한국이라면 입구부터 거대한 석상이 보이고, 줄넘기 같은 운동기구 반입도 안 되고, 6시 이후엔 출입을 통제하지 않았을까. 현충원보다는 광화문 광장의 느낌이랄까. 중화권 국가인데도 한국보다 덜 보수적이고, 쓸데없는 격식은 버리는 실속 있는 나라라는 느낌을 받았다. 101 빌딩의 야경을 바라보며 타이페이 도심을 함께 걷다가, 아홉 시쯤 작별인사를 하고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모든 것이 신기한.
대만에서의 첫 하루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다가올 주말의 가오슝 여행의 기대감과 함께.
이제는 스물한 살 꼬맹이가 쓰는
스무 살 꼬맹이의 45개국 엽서여행 에세이.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