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 할아버지 이야기
우도. 제주에 닷새 머물렀던 작년 4월엔 갔었고, 석 달이나 머물렀던 올해 초엔 가질 못 했다. 그래서 이번에 제주에 내려오자마자 간 곳이 우도다. 제주도의 동쪽 끝, 성산에서도 배를 타고 15분을 들어가야 하는 곳. 섬의 모양이 소가 누워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우도. 제주의 오른쪽 끝이어서 붙여졌나 생각되기도 하는 이름, 우도. 참 재미있는 우연이기도하다. 예쁜 섬이기도 하고.
지난번엔 자전거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았었다. 호스텔에서 만난 대만 친구들과 함께. 열아홉 살 때다. 캄보디아에 가기도 전에, 엽서여행의 아이디어조차 없었고 사진작가도 아니었던 시절에 말이다. 그때 묵었던 호스텔에서 일을 하게 됐고, 그렇게 엽서여행을 떠나게 됐다. 그래 봐야 일 년 전이지만, 그새 참 많은 게 변했다. 다들 스쿠터든 자전거든 자동차든, 앉아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타고 가지만 이번엔 걸어보고 싶었다. 빠르고 편하게 지나치며 놓친 디테일을 잡아내고 싶었다. 세 달은 있을 작정이니, 시간이 여유로워서이기도 하고. 데이트나 웨딩 촬영을 위한 로케이팅의 의미도 있었다. 카메라에 렌즈 두 개 그리고 삼각대와 생수 두 병까지. 기본 장비 무게만 7kg에 가까운 배낭을 메고 하루 종일 걸어 댕기려니 살짝 걱정되긴 했지만.
천진항에서 내려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스쿠터 여러 대와 버스 몇 대가 지나가고 나니 조용한 해안도로를 혼자 감상하며 걸을 수 있었다.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에 몸을 맡기고 고개를 흔드는 억새까지. 거기에 동행도 없이 혼자 갔으니, 편안하게 걸으며 여유롭게 사진도 찍고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풀을 뜯는 소들과 길을 따라 늘어선 곰보 돌담길. 저 멀리 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와 밭일하는 마을 아주머니.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이 눈을 가득 채웠다. 올레길을 따라 3킬로미터쯤 걸었을까, 산호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익숙한 식당가가 나왔다. 작년에 해물칼국수를 먹었던 식당도 그대로 있었고, 새로 생긴 가게들도 보였다. 도로변을 따라 늘어선 500미터도 안 되는 이 식당가가 우도에서 가장 북적대는 곳이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펜션촌도 있고 하우목동포구도 나온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편의점에서 물 한 병을 더 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오봉리의 바닷가에 멈춰 섰다. 검은 곰보 돌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었다. 바다에는 해녀 여러 명이 물질을 하고 있었고 저 멀리 바다 건너에는 한라산의 실루엣을 간직한 제주도의 모습도 보였다. 꽤나 많이 걸었기에 잠시 쉬어가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옆에 앉아계시던 할아버지께서 날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말을 걸어오신다.
자넨 어디에서 왔는가?
서울서 왔어요. 어제 밤에요
허허 혹시 중국산인가 싶었는데 국산이고만 (웃음)
하하, 할아버지는 고향이 여기세요?
그럼. 여기서 나고 자랐지. 여기 한참 앉아있는 걸 보니, 서울 촌놈도 우도 예쁜 줄은 아는구먼.
네 한참 걷다가 바다가 예뻐서 잠시 쉬다 가려고 앉았죠.
(카메라를 보시더니) 자넨 사진작가인가?
하하 사람들은 작가라고도 부르는데, 그냥 좋아서 찍는 거죠 뭐.
우리 아들내미도 사진을 참 좋아하는데 말야, 지금은 서울에 올라가 있어 얼굴도 자주 못 보는구먼.
아, 아드님은 서울에 계세요?
그럼. 경희대학교 졸업하고 행정고시 붙어서 서울 강남에 회계사 사무소를 냈어. 요즘 세상은 옛날 같지 않아서 추석 때 아니면 자식들 얼굴 보기도 힘들어.
그러다 갑자기 옆에 있던 다른 아저씨가 저 멀리에서 통발을 안고 헤엄치는 해녀를 향해 제주 말로 소리쳐 인사를 하시더니 할아버지와 몇 마디를 나눈다. 제주 말로……..(하나도 못 알아들음) 그러더니 할아버지는 그 해녀에게 손을 흔드신다. 해녀도 손을 같이 흔든다.
저 분은 마을 분이세요?
허허, 아니 우리 집사람이야. 마누라가 물질하러 나오면 나도 자주 나오거든.
그래 총각. 난 이제 가봐야겠네. 걸어서 간다고 했지? 이리로 가면 돌탑 많은 데도 나오고 등대도 나오고, 거기서 조금 지나면 하고수동이야. 거기도 예쁜 해변이 있어. 젊은 사람 걸음이니 두세 시간쯤이면 천진항에 충분히 도착할 거야. 우도에서 재밌게 놀다 돌아가. 꼭 재밌게 놀다 가야 해! 꼭!
우도 할아버지와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같이 일어섰다.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반짝이는 바다와 제주도 본 섬을 등지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르릉, 스쿠터 시동 거는 소리를 남기고 할아버지도 저 멀리 멀어져 갔다.
우도, 우도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