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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개국 엽서여행

진짜 시작

눈을 떠 보니 9시 반. 아직은 새로운 환경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인지, 새벽 세 시에 잠든 것 치고는 너무나 멀쩡했다. 그리고는 즉시 굉장히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프런트에 찾아갔다. 어제와는 다른 스탭인 Connie가 앉아 있었고, 난 옮겨야 할 호스텔의 위치와 함께 주변에 있는 괜찮은 식당을 물었다. 식당보다는 가판을 추천하는 Connie. 식당보다 저렴하고 대만 스타일의 음식이 많단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전날 밤에 입었던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는 가볍게 카메라만 들쳐 메고 동네 음식 탐방을 나갔다.

전날 밤 원망스럽게 떨어지던 빗방울은 더 이상 날 괴롭히지 않았다. 다만 바람이 꽤나 많이 불었던 걸로 기억한다. 떠나온 곳을 기억하라는 의미였을까. 제주의 바람이 나와 함께 대만에 온 듯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역 근처. 그래서인지 바깥쪽 골목에는 조그만 가게들보다는 프랜차이즈 매장들이 많았고 그마저도 아직 준비 중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허기가 몰려와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에 일단 편의점에 들어가서 빵과 우유를 샀다. 빵을 오물오물 씹으며 두 블럭쯤 걸어 들어갔을까, 몇 개의 가판이 늘어선 골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만두도 있었고 호떡같이 생긴 빵을 부치고 있는 곳도 있었다.  그중에 내 눈에 들어온 건 주먹밥. 뭘 줘도 잘 먹는 식성의 소유자지만, 왠지 밥이라서 끌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그 자리에서 바로 뭉쳐서 팔았다. 한 입 크게 물어보니 튀김과 양념이 들어있었다. 좀 전에 먹었던 편의점 빵도 참 괜찮았지만, 아 역시 따뜻한 밥인가. 빵과 우유, 조그만 만두에 주먹밥까지. 배 터지게 먹고도 쓴 돈은 대만 돈으로 87달러, 한국 돈으로는 3000원. 전날 밤의 고생을 한 번에 쓸어내릴 수 있는 기분 좋음이었다. 적은 돈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이니만큼, 내릴 수 있는 식비의 최저선이 아주 낮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안도감이었다. 배부르고 기분 좋은 아침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Connie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내 여행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공식적으로는 프로젝트 시작 후 처음으로 하는 내 소개였다. 멋진 여행 계획이라며 귀 기울여 듣는 Connie. 이때만 해도 Connie가 내게 얼마나 큰 지원군이 될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하고,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이 부분이 제일 중요함), 짐을 싸 들고는 원래 예약했던 Ximen지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 거리로는 약 1킬로미터. 한 짐 가득이라 계단이 무섭기도 했고, 타이페이의 모습을 한껏 느끼고 싶어 걸어가는 쪽을 택했다. 아, 물론 구글 맵을 미리 로딩해 둔 상태였다. 다행히 흐린 날이라 덥지 않아서 걷기에 딱 좋았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역 근처라 큰 건물들도 많았고 사람들도 많았다. 시장도 있었고  이런저런 가판들과 가게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브랜드들, 백 년은 돼 보이는 대만 중앙은행 건물도 있었다. 길을 떠난 지 10분쯤 지났을까, 골목 끝에 큰 대로가 펼쳐져 있는 게 보였다. 거기서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거의 다 왔다고. 그래서 구글 맵을 켜서 상세한 위치를 확인했다. 앞에 보이는 큰 사거리가 Ximen역 사거리고, 숙소는 3번 출구 방향. 안쪽 골목이라는 것을. 자세한 위치를 파악하고 나니, 어려울 건 하나도 없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나를 바로 알아보는 스탭들. 내가 전날 밤에 꽤나 재밌는 실수를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긴장감에 눌려있던 피곤함이 한 번에 몰려왔고 그대로 잠에 들었다. 잠에서 깨니 오후 세 시쯤. 확실히 제대로 자고 나니 몸이 가벼웠다. 날 짓누르던 위기감에서 벗어난 탓이 크긴 하지만. 간단히 세수를 하고 로비에 나가 보니 전날 밤에 날 체크인시켜준 스탭이 앉아 있었다. 날 보자마자 드디어 제대로 찾아왔다며 날 반기는 Terry. 아, 스탭이 아니라 매니저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무급 스탭 얘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 일했던 한국인 스탭 Mimi의 친구인데, 엽서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여행을 떠나 왔다고. 사진도 찍을 줄 알고 영어도 좀 하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맡겨달라고 했다. 그러자 정말 놀랍게도, 안 그래도 새로운 객실 사진이 필요해서 작가를 찾고 있었단 얘기를 꺼내는 Terry. 천운 중의 천운이었다. 내가 고마워해야 할 상황인데, 오히려 Terry가 내게 객실 사진 얘기를 먼저 꺼내 줘서 고맙단 얘기를 하더라. 꽤나 절박하게 필요하긴 했구나 싶었다. 주말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난 가오슝에 다녀올 거라는 얘기를 했고, Terry는 그러면 업무 얘기는 월요일에 하자며 즐겁게 놀다 오라고 했다.

절박하지만 가볍게 꺼낸 얘기들이 내 여행의 중요한 빈칸들을 채워주고 있었다.

얘기하지 않으면 모른다. 기회는 많다는 것을, 그리고 기회는 그것을 주도적으로 찾는 사람에게만

허락된다는 것을. 그렇게 배워가고 있었다.

스물한 살 꼬맹이가 쓰는 

스무 살 꼬맹이의 45개국 엽서여행 에세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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