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부 기자로 일하던 시절, 부산국제영화제 취재를 여러 번 했다. 낮에는 영화가 먼저였지만 밤은 늘 달맞이고개로 향했다. 달이 뜨면 해운대 미포나 청사포의 갯바위는 거대한 선술집으로 변했다. 영화제가 열리던 시절의 부산은 해방구였다. 낮 동안 어두운 극장에서 필름의 잔상을 쫓던 우리는 밤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 해운대 달맞이고개로 모여들었다. 대포집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마시는 소주 한 잔에는 파도 소리가 섞였고 바다 위로 떠오른 둥근달은 그대로 안주가 됐다. 밤은 깊어가고 그 짭조름한 바닷바람 속에서 우리들의 영화도, 사랑도, 우정도 함께 깊어갔다.
그곳에서 만난 부산 사람들은 거칠었으나 다정했다. 툭툭 던지는 부산 사투리에는 문학과 영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녹아 있었다. 가객(歌客) 최백호는 노래 ‘부산에 가면’에서 ‘부산에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 고운 머릿결을 흩날리며 나를 반겼던 그 부산역’이라며 흘러간 시간과 고향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노래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이 노래를 들으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부산병’, 즉 고향에 대한 지독한 향수에 젖는다고 했다. 대도시의 화려함 바로 뒤편에 밀려오는 고독과 바다의 잔상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다.
외국인도 ‘부산앓이’ 중
그런데 최근 이 ‘부산병(釜山病)’이라는 단어가 국경을 넘어 전혀 다른 맥락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대만, 일본 등 아시아권을 넘어 서구의 젊은 여행자까지 누리소통망(SNS)에 ”부산 여행에서 돌아왔는데 벌써 ‘부산앓이’를 하고 있다“며 자신들이 부산병 환자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과거 외국인에게 한국 여행은 곧 ‘서울 여행’과 동의어였다. 빽빽한 빌딩숲과 현대적인 세련미를 좇는 ‘서울병’이 유행했다면 이제는 부산이 새로운 그리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지난해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364만 3439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들이 부산 땅에 뿌리고 간 돈만 해도 1조 531억 원에 달한다. 대만(18.9%)과 중국(15.4%), 일본(14.9%)이 주축을 이루지만 최근에는 서양인의 발길도 눈에 띄게 늘었다.
올해의 기세는 더 무섭다. 1분기(1~3월) 동안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벌써 102만 3946명을 돌파했다.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4년 이후 ‘최단 기간 100만 명 돌파’라는 대기록이다. 감천문화마을의 좁은 골목에는 한복을 입은 외국인이 가득하고 BIFF광장의 호떡집 앞에는 외국인이 매출의 95%를 채우며 길게 줄을 선다. 오죽하면 택시기사가 ”어떤 날은 승객의 80%가 외국인이라 부산에 이렇게 외국인이 많았던 적이 있었나 싶다“고 혀를 내두를까.
외국인이 말하는 부산병의 원인은 명확하다.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문 ‘거대한 대도시와 광활한 바다가 공존하는 도심형 해양도시’라는 점이다. 도심에서 지하철을 타고 몇 분 만에 백사장에 닿는 도시는 흔치 않다. 세련된 초고층 빌딩숲 바로 옆으로 해운대와 광안리의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고개를 돌리면 감천문화마을이나 청사포 스카이캡슐 같은 ‘인스타그래머블(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한 풍경이 쏟아진다.
”삶과 냄새가 더 잘 보이는 도시“
여기에 서울과는 다른 부산만의 ‘맛과 멋’이 더해진다. 서울이 다소 차갑고 깍쟁이 같은 세련미를 풍긴다면 부산은 어딘가 느슨하고 여유롭다. 프랑스에서 온 한 관광객의 말대로 ”서울보다 현지 사람들의 삶과 냄새가 더 잘 보이는 도시“다. 길을 헤매는 이방인에게 무뚝뚝하게 다가와 직접 길을 안내해주는 부산 사람들의 투박한 정(情), 그리고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와 돼지국밥·밀면 같은 풍성한 로컬 먹거리가 여행자의 긴장을 해제시킨다. 대만 여행 커뮤니티에는 ‘항공권과 숙박, 식비를 합쳐 1만 5000 대만달러(약 71만 원)면 일주일을 풍족하게 머문다’는 가성비 후기가 넘쳐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산을 향한 시선은 어두웠다.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나고 인구가 줄어들면서 부산에는 오직 ‘노인과 바다’밖에 남지 않았다는 자조와 자학이 팽배했다. 고령화와 지방소멸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고독한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 부산은 그 ‘바다’를 무기로 세계의 젊은이들을 불러모으며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있다. 피란 시절의 애환이 담긴 골목과 독특한 음식 문화가 시간의 이끼를 입고 가장 ‘힙’한 콘텐츠로 재해석된 덕분이다. 싱가포르의 여행 매체는 부산을 최고의 도시 관광지로 선정했고, 익스피디아 재팬은 최고의 가성비 여행지로 꼽았다. 과거의 자조는 사라지고 이제 부산은 세계의 청춘들이 심리적으로 오래 붙들려 있고 싶어 하는 ‘기억에 남는 도시(Memorable City)’가 됐다.
단순히 ‘좋았다’는 감상을 넘어 ‘앓고 있다’고 표현하는 외국인의 고백은 부산이라는 도시가 가진 에너지와 인간미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는 증거다. 노인과 바다의 도시에서 이제는 세계의 청춘과 활력이 넘실대는 국제 관광도시로의 귀환. 달맞이고개의 달빛 아래서 우정과 사랑을 논하던 그 시절의 낭만이 이제는 전 세계 언어로 부산 앞바다를 채우고 있다. 최백호는 노래한다. ‘무작정 올라간 달맞이 고개엔 오래된 바다만 오래된 우리만/ 시간이 멈춰버린 듯 이대로 손을 꼭 잡고 그때처럼 걸어보자/ 아무생각 없이 찾아간 광안리/ 그때 그 미소가 그때 그 향기가/ 빛바랜 바다에 비쳐 너와 내가 파도에 부서져 깨진 조각들을 맞춰본다/ 부산에 가면’.
이번 여름엔 달맞이고개에 가야겠다. 어수웅 조선일보에서 문학, 영화,
books 등 문화부 기자를 오래했다. 지은 책으로 ‘탐독’ ‘파워 클래식’ 등이 있다. 주말뉴스부장, 문화부장, 여론독자부장을 거쳐
현재 논설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