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유튜브는 맹렬하다. 그곳엔 소통의 규칙을 강제하는 제도가 없다. 책임 있는 리더는 개인 채널의 호명과 평가에 의탁 중이다. 제왕이 후퇴한 자리, 무수한 맹주가 협력과 갈등의 지도를 그린다. 이들이 그려내는 일일드라마는 형체를 알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평판을 베어내고 밥줄을 위협하는 살풍경만큼은 확실하다. 이러니 대안 미디어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진실을 포착하기는 난망하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채널을 옮겨가며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는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다. 대다수는 각자의 에코챔버 안에서 성벽 밖의 이교도와 공방을 주고받는 중이다. 이들에게 공성과 수성의 전선에서 피어나는 진실은 절대 고정돼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지적 예민함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문제가 커지기 전에 징조를 깨닫는 법이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걸 느끼는 이들에게 생존은 이교도와의 전쟁이 아니라 자기 편 내부에서 먼저 확보돼야 한다. 이처럼 내면의 진실을 배반하고 자기 편에 무조건 동조하는 체하는 것을 가리켜 ‘선호 위장(preference falsification)’이라고 한다. 양심의 소리를 잠재워야 하는 건 최종면접장의 지원자뿐만이 아니다.
이교도가 전해주는 진실
문제는 이교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내가 믿고 있는 바의 진실성을 판정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 투쟁을 근본에 두는 입장에서는 당장의 여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게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명목적으로나마 내세웠던 목표 달성에는 종종 실패하기도 한다. 일단 목표 달성에 실패하면 이교도가 옳고 내가 틀렸다는 자각이 생기기도 하고 심한 경우 우리 편의 안위 자체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2024년 구글의 인공지능(AI) 서비스 제미나이가 이미지 생성 서비스를 대대적으로 시작할 때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군을 그리라는 프롬프팅이 내놓은 결과물이 슈탈헬름(Stahlhelm·독일군 철모)을 쓴 아시아 여성이었다. 문제는 2차 세계대전 독일군이라는 부정적 상징에 아시아와 여성이라는 문화적 소수자를 연결했다는 데 그치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이 결과가 ‘생성된 이미지에 백인 남성을 덜 넣으라’는 DEI(다양·평등·포용) 원칙이 알고리즘에 반영된 탓이라는 데 있었다.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한 구글의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은 이 결과물을 보고 ”우리가 확실히 망쳤다(We definitely messed up)“며 자조했다.
구글의 영리한 두뇌들이 그 기괴한 결과물을 미리 보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곳에서 DEI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 불순한 이교도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들은 진실을 말하다가 성 밖으로 내쳐질까 두려워했다. 선호 위장은 이미지 생성팀 전체의 상위 코드가 됐다. 그러다 이 집단적 환각이 외부 시장의 객관적 평가와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가뜩이나 챗GPT를 따라잡아야 하는 시장 압박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이교도로 핍박받는 건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됐다. 그러나 이교도가 진실을 전해주었을 때 프로젝트는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판정받고 말았다.
이단이 전해주는 진실
이교도가 외부의 적이라면 이단은 내부의 적이다. 이교도가 전해주는 진실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과 함께 온다면 이단과의 투쟁은 최소한 스스로를 고칠 수 있는 시간적 여지를 남긴다.
2026년 인공지능 연구소를 휩쓴 연쇄 이탈 사태는 자본과 속도가 빚어낸 착란에 대한 경고다. 미국 AI기업 오픈AI와 앤트로픽은 늘 안전을 입에 올렸으나 그들의 몸통은 이윤과 기득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내부의 연구자들은 통제되지 않은 기술의 파국을 예감했다. 그러나 거대한 질주 앞에서 제동을 말하는 자는 진보를 가로막는 파멸론자로 낙인찍혔다. 낙인은 곧 조직 내에서 죽음을 의미했다. 두려움에 질린 자들은 회의실에서 침묵했고 조직은 기만적인 만장일치로 굴러갔다.
이 견고한 기만에 반기를 든 내부의 이단자들이 나타났다. 오픈AI의 조이 히치그와 앤트로픽의 므리난크 샤르마가 스스로 짐을 쌌다. 그들이 밖을 향해 내부의 거짓을 고발했을 때 타격은 치명적이었다. 그들이 회사 밖의 이교도가 아니라 내부의 이단자였기 때문에 충격이 더했다.
회사는 급히 새로운 대체 인재를 영입했으나 인공지능의 안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은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이다. 이단이 전한 진실 때문에 우리가 실패를 피할 시간적 여유를 어느 정도 확보한 셈이다.
외부의 이교도가 던지는 돌팔매는 성벽 안의 결속을 다져주기 십상이다. 다수의 대형 채널이 지배하는 유튜브 세계에서 견고한 착란의 벽을 깨는 것은 결국 제 몫의 피를 흘리며 걸어나오는 내부의 이단아들이다. 이들의 고독한 단절이야말로 네임드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합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최선책이다.
첨단의 기술을 빚어내는 심장부에서도 인간 무리가 빚어내는 어리석음과 그 굴레를 벗어나는 구도는 이토록 낡고 질기다. 하물며 ‘좋아요-구독-후원’의 깃발 아래 하루를 연명하는 유튜브 채널과 구독자는 어떨 것인가. 이들에게 올라타 제도권에 진입하고 국가의 백년을 좌지우지할 규칙을 만들어내는 이들은 또 어떠할 것인가. 사람은 밥 앞에서 비겁하고, 무리 지어 안도하며, 오직 스스로 무리를 깨고 나올 때만 간신히 진실과 대면한다. 단절을 무릅쓰고 양심의 긴장과 고통을 드러내는 이단을 찾아 오늘도 무심히 스크롤을 내려본다.
이원재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