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의 울타리에 넝쿨장미가 만발했다. 잘 정돈된 화단의 꽃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이렇게 잘살게 되었을까?’
한국은 6·25전쟁 직후만 해도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다.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나 소말리아만큼이나 가난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고 변변한 천연자원도 없던 나라가 인적자원에 투자해 서양이 200년 넘게 걸린 산업화를 불과 30~40년 만에 달성했다. 한국의 압축 성장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 전략과 기업가정신이 작동한 결과였고 한국인 특유의 공동체 문화와 회복탄력성이 더해진 성과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교육열이다. 지금의 한국을 만든 가장 강력한 동력 가운데 하나는 한국인의 교육에 대한 집념이었다.
집보다 학교 먼저
우리 민족이 얼마나 교육에 진심이었는지는 고려인의 이주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스탈린은 1937년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최소한의 짐만 허용되었는데 고려인은 식량이나 옷보다 책을 먼저 챙겼다. 교육을 위해서였다.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고려인은 얼어붙은 황무지에 움집을 짓고 첫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이듬해 봄, 집보다 먼저 학교를 세웠다. 당시 고려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아이들 교육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강제이주를 당한 민족 가운데 학교부터 세운 공동체는 고려인이 유일할 것이다. 그들에게 학교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를 세우는 일이었다. 집이 오늘을 위한 것이라면 학교는 내일을 위한 것이었다.
1927년에 찍은 ‘강원강릉서당’ 사진 역시 고려인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교육에 전념했던 우리 민족의 일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한국인의 높은 교육열은 여러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우선 유교문화의 영향이다. 유교에서는 배움이 인간의 도리이며 입신출세하는 것이 효도라고 가르친다.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는 숭문(崇文)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문을 숭상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사회적 성공을 거뒀더라도 학문이 부족하면 ”머릿속에 글이 들어 있지 않다“고 무시당했다.
또 다른 이유는 교육이야말로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면 신분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6·25전쟁 이후 국가 재건 과정에서 실제로 교육이 계층 상승의 수단이 됐다. 그래서 교육은 국가 발전전략이자 모든 가정의 열망이 되었다.
한국 사회를 움직인 가장 뜨거운 에너지
물론 한국의 교육열이 늘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의 목적이 사람의 도리를 깨우치거나 인격 완성을 가르치는 대신 출세와 부귀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결과 과도한 입시 경쟁과 사교육 문제가 심화됐다. 교육 수준이 비슷한 사람끼리 결혼하는 ‘교육적 동질혼’ 현상도 이미 오래전부터 일반화됐다. 좁은 국토와 제한된 기회 구조 속에서 교육이 거의 유일한 경쟁 수단이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럼에도 교육열은 여전히 한국 사회의 성장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인은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인내심과 학습 태도를 체득한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주어졌을 때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제한된 시간 안에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내려 한다. 아무리 어려운 미션이 주어져도 회피하지 않고 해결하려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
한국에 온 한 외국인이 ‘공무원도 일을 잘할 수 있다는 걸 한국에 와서 처음 알았다’고 말할 정도다. 자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그 자격으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는 한국인의 특징은 교육열이라는 토양 위에서 자라난 결과일 것이다. 교육열은 때로 과열되기도 했지만 오늘의 한국을 있게 만든 가장 강력한 에너지다.
조정육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