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1440m)은 백두대간 한복판에서 부드러운 능선을 고요히 펼쳐보이는 산이다. 날카로운 바위산이 기암괴석의 미학을 뽐낸다면 소백산은 어머니 치맛자락처럼 푸근하게 사람을 품는다. 소의 등을 닮은 순하디순한 능선 위로 사계절 내내 거센 바람이 분다. 그래서 ‘바람의 산’으로도 불렸다.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식물만 꽃을 피우며 가장 소백산다운 얼굴을 보여주는 때가 6월이다.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봉화를 품은 소백산은 세속의 욕심을 내려놓고 자연과 동화되기 좋은 곳이다. 1987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소백산은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 가장 높은 정상인 비로봉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서 기원하였다. 호위하듯 솟은 여러 연화봉은 진리의 세계인 ‘연화세계(蓮華世界)’에서 유래했다.
화려한 축제 뒤 신록의 향연
소백산의 진정한 매력은 하늘과 맞닿은 광활한 초원과 겹겹이 쌓인 부드러운 산그리메에 있다. 능선을 걷다 보면 발아래로 펼쳐지는 들꽃의 향연이 산행의 고단함을 씻어준다. 봄이 오면 양지꽃과 노랑제비꽃이 병아리처럼 쫑알거리고, 현호색과 얼레지가 보랏빛 팡파르를 불며, 꿩의바람꽃이 하얀 축포를 쏘아올린다.
도시에서 봄꽃이 피고 지길 여러 번 반복하고 여름이 다가와서야 소백산 능선의 철쭉은 비로소 꽃을 피운다.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소백산의 능선을 수놓는 연분홍 철쭉은 도심 화단의 철쭉과는 격이 다르다. 도심 철쭉은 색이 짙고 화려한 ‘산철쭉’인 반면 그냥 ‘철쭉’인 이곳의 꽃잎은 둥글고 색이 연하다. ‘연달래’라 불리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화려한 도시 미인보다 산골 처녀처럼 순수하다.
철쭉의 원래 이름은 ‘척촉(躑躅)’인데 두 글자 모두 ‘머뭇거리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다는 의미와 함께 독성이 있어 양들이 보기만 해도 머뭇거린다는 ‘양척촉’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사랑의 즐거움’이라는 꽃말 이면에 치명적인 독성을 품고 있다.
5월 말이면 소백산 일대에서 철쭉축제가 열린다. 축제 인파가 휩쓸고 지나간 6월에 산을 찾으면 능선에 만개한 꽃 대신 땅에 투두둑 떨어진 철쭉 눈물을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꽃이 진 자리를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신록이 채운다. 화려한 축제는 끝났어도 한층 여유롭고 한적해진 산길을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것은 오직 6월의 산객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다.
비로봉에서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과거 퇴계 이황이 ‘비단 장막 속을 거니는 것 같다’고 극찬했던 길이다. 비로봉에 비해 찾는 이는 적지만 국망봉에는 전망대 역을 하는 바위가 있다. 여기에 올라서면 온 세상 바람이 소백산을 지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바람에 마음을 실어 보내면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듯하다.
퇴계가 극찬한 길
요즘은 하루 만에 이 코스를 주파하지만 퇴계 이황은 이 길을 5일에 걸쳐 음미했다. 퇴계는 산행기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서 ”소백산은 늘 바라보면서도 오르지 못한 지 40년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조선 명종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그는 이듬해인 1549년 주능선의 눈이 녹은 음력 4월 22일(양력 5월 17일) 마침내 소백산을 찾았다. 관할 군수였음에도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지 않은 조촐한 여정이었다.
첫날 소수서원에서 유생들과 하룻밤을 보낸 퇴계는 둘째 날 진사 민서경, 승려 종수 등 소수의 일행과 함께 죽계계곡을 올랐다. 계곡의 절경마다 이름을 붙인 것이 오늘날의 ‘죽계구곡’이 되었다. 초암사에 이른 뒤에는 험한 능선을 기어오르듯 올라야 했다. 퇴계는 ”사람이 절벽에 매달린 것 같았다“고 기록했다. 마침내 국망봉 꼭대기에 올랐으나 안타깝게도 구름 때문에 시야가 트이지 않았다. 그러나 매서운 바람 속에서 비틀린 채 자라는 고산 나무들을 보며 ”나무도 사람도 처한 환경에 따라 성질이 달라진다“는 깊은 통찰을 얻었다.
오늘날 소백산 산행은 훨씬 편안해졌다. ‘호텔급 전망’을 자랑하는 제2연화봉대피소 덕분이다. 죽령에서 시멘트 임도를 따라 4㎞를 오르면 닿는다. 운동화를 신었더라도 오르막 2시간을 견딜 지구력만 있으면 등산 초보자도 해발 1357m 능선 위에서 노을과 별, 해돋이를 보며 하룻밤 묵을 수 있다.
소백산은 다녀온 뒤 더 오래 남는 산이다. 걷는 동안에는 내가 산을 오르는 것 같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산이 지친 마음을 내내 다독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화려한 절경으로 단번에 압도하기보다 오래 곁에 머무르며 천천히 스며드는 산, 소백산의 힘은 거기에 있다.
신준범 월간<산> 기자
알고 가면 좋은 정보
추천 코스1: 희방사~연화봉~비로봉~국망봉~초암사~배점리(17㎞, 9~11시간 소요)
소백산의 핵심 주능선을 모두 밟는 코스로 퇴계 이황이 하산하며 감탄했던 죽계구곡(초암사~배점리)의 비경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추천 코스2: 천동리~비로봉~연화봉~천동리(22㎞, 8~9시간 소요)
소백산은 경상도와 충청도가 나뉘는 곳이라 자가용 이용 시 차량 회수가 까다롭다. 비로봉~연화봉 구간은 소백산의 하이라이트라서 연화봉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더라도 지루하지 않다.
제2연화봉대피소 예약: 국립공원공단 예약시스템을 통한 사전 예약이 필수다. 대피소 내 취사장에서만 음식 조리가 가능하며 발생한 모든 쓰레기는 직접 수거해 하산해야 한다.
기상 및 보온 준비: 소백산은 ‘바람의 산’이다. 도시는 따뜻한 봄 날씨일지라도 주능선은 여전히 동장군이 기세를 부리는 겨울일 수 있다. 반드시 바람을 막아줄 방풍재킷과 경량패딩 등 보온의류를 사계절 내내 필수로 지참해야 한다.
안전 산행을 위한 조언 능선이 부드러워 보인다고 해서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여간한 코스는 하루에 20㎞가량 걸어야 하는 장거리 산행이다. 가파른 돌길과 끝없는 계단에서 관절과 연골을 보호하기 위해 발목을 잡아주고 창이 두꺼운 중등산화와 등산스틱은 필수다. 운동화나 청바지 차림의 무모한 산행은 관절 부상과 피로를 유발해 산이 주는 감동을 고통으로 바꿔놓을 수 있으므로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