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심의에 난데없는 ‘연예인’이 등장했습니다. 물론 진짜 연예인은 아닙니다. 정부가 연간 35조 원 규모의 국가 R&D 예산 심의에 인공지능(AI)을 전격 도입하기로 하면서 탄생한 것인데요. 이름하여 ‘연.예.인’, ‘연구개발 예산 심의 인공지능’의 줄임말입니다.
그동안 국가 R&D 예산 심의는 심사를 맡은 전문위원들에게 사실상 ‘행정 전쟁’에 가까웠습니다. 최근 기술 발전은 빨라지고 사업 수가 급증하면서 검토해야 할 사업 규모가 대폭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국가 R&D 사업 건수는 2017년 639건에서 올해 1430건으로 2.2배 늘었고요, 예산 규모도 같은 기간 18조 9000억 원에서 35조 5000억 원으로 1.8배 커졌습니다. 전문위원 한 명이 적게는 수십 건, 많게는 200건 넘는 사업 자료를 일일이 검토하다 보니 지난해엔 심의 기간 동안 새벽 2시에 잠들고 아침 6시에 출근하는 일이 반복됐다고 합니다.
이 같은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올해 진행 중인 2027년도 국가 R&D 예산 배분·조정 과정부터 특화 AI ‘연.예.인’을 적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국내 AI 스타트업 ‘업스테이지’의 독자 모델 ‘솔라오픈’을 기반으로 개발된 이 AI는 정부 예산 심의를 돕는 전용 대형언어모델(LLM)입니다. 이제는 사람 대신 AI가 행정 업무를 함께 처리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는 셈입니다.
커지는 행정 폭탄, AI로 해결한다
최근 몇 년 동안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는 매년 5~6월이면 이른바 ‘지옥의 레이스’를 치러야 했습니다. 각 부처에서 올라온 1000개가 넘는 R&D 사업 예산 요구서를 검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전문위원 166명과 직원들이 사업의 필요성과 예산의 적정성을 꼼꼼히 따져야 했는데 그 양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사업 내용을 검토하기보다 회의록을 정리하는 등 행정 업무에 치여 밤을 새우는 일도 허다했고요. 한 과기정통부 사무관은 ”기본 양식 작성에 시간을 다 쓴다는 직원들의 한탄도 적지 않았다“고 귀띔했습니다. 결국 과기정통부는 이 문제를 AI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예산 심의 전용 AI ‘연.예.인’입니다.
연.예.인 개발엔 국내 기술이 총동원됐습니다. 별도의 예산을 쓰지 않고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인력과 장비를 최대한 활용해서 5개월가량 들여 완성했습니다. 국내 AI기업 업스테이지의 ‘솔라오픈 100B’를 기반 모델로 삼았고요. ‘솔라오픈’이 거대 모델인 LG의 ‘K-엑사원’이나 SK텔레콤의 모델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아 정부 보유 자원으로 빠르게 학습시킬 수 있고 실제 서비스에 즉시 투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얘기입니다.
학습량도 상당합니다. 최근 5년간 축적된 약 2850개의 국가 R&D 사업 자료와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서비스(NTIS)의 1243만 건 연구 성과 데이터, 관련 서류 2만여 건을 학습했습니다.
정부 예산 심의는 무엇보다 보안이 중요하죠. 행정 데이터에 외산 모델을 의존할 경우 보안과 산업안보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국산 AI 모델을 적용한 것입니다. 연.예.인은 국가정보원 보안성 검토를 거쳤습니다. 자료 유출 방지 이중화 시스템도 적용됐고요. 보안 강화와 정확성을 위해 연.예.인에선 또한 외부 웹 검색이 차단됩니다. 오직 내부 심의 자료와 검증된 NTIS 데이터 안에서만 답변하도록 설계됐습니다. 답변에는 출처를 표기해 정보 투명성도 높였습니다.
”연.예.인, 중복 사업 찾아주고 초안도 써줘!“
이렇게 완성한 연.예.인은 앞으로 예산 심의 담당자의 똑똑한 비서 역할을 할 예정입니다. 가장 먼저 맡을 일은 방대한 자료를 ‘읽기 쉽게’ 만드는 작업입니다. 서류에서 사업 목적과 기술 내용, 예산 규모 등 핵심만 골라 요약해줍니다. 전문위원이 서류를 빠르게 검토할 수 있게 된 것이죠.
특히 일일이 눈이 빠지도록 검토해야 했던 유사·중복 사업도 기가 막히게 분석해냅니다. 특정 사업과 비슷한 과거 과제를 순식간에 찾아내 비교해줍니다. 단순히 제목이 비슷한 사업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이 겹치고 어떤 점은 다른지도 함께 정리해줍니다. 가령 신규 에너지 기술개발 사업이 올라오면 연.예.인이 과거 유사한 국산화 사업을 찾아주는 겁니다. 기술개발 사업은 키워드가 같아도 개발 방식이나 목표에 따라 다른 과제가 될 수 있어 그동안 유사·중복 판단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연.예.인이 도입되면서 유사성과 차별성을 순식간에 분석할 수 있으니 예산 심의 담당자가 판단 기준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중복된 사업을 빨리 찾아낼수록 재정 절감 효과는 커집니다. 국가 R&D 예산 35조 원 가운데 10%에 해당하는 중복·비효율을 추가로 잡아낸다고 가정하면 단순 계산으로 3조 5000억 원의 재원을 다른 분야에 투자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이밖에도 연.예.인은 전문위원의 회의록 요약, 회의 쟁점 분석은 물론이고 검토의견서나 예산심의서, 조정결과서 초안을 쓰는 일도 돕습니다. 과기정통부는 이를 통해 행정 업무 소요시간을 50% 이상 줄이고 종이 없는 ‘페이퍼리스 예산 심의’ 환경 구축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 현장 반응도 나쁘지 않습니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5월 11일부터 실제 심의를 시작한 전문위원 166명은 이미 한 차례 이상 이 서비스를 사용했습니다. AI 분야를 담당하는 한 전문위원은 ”심의 기간엔 업무에 치여 제대로 밥 한 끼 먹기도 어려웠는데, AI를 활용한 뒤 제때 식사할 여유가 생겼다. 자잘한 행정 업무 대신 본연의 심의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최종 검토는 결국 사람 몫“
똑똑한 연.예.인이 탄생했지만 AI가 항상 만능은 아니죠. AI가 초안을 만들어도 최종 판단은 반드시 사람이 해야 합니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연.예.인은 자료 검색과 정리를 돕는 보조 도구일 뿐 최종 판단과 책임은 전문위원이 져야 합니다. AI가 작성한 초안은 결코 최종 문서가 될 수 없고 전문위원이 여기에 자신의 판단을 덧붙이고 보완·점검해 최종 의견으로 완성합니다.
우려도 있습니다. AI가 거짓 정보를 그럴듯하게 내놓는 ‘환각 현상(hallucination)’을 보이거나 특정 데이터에 치우치는 편향 문제가 대표적입니다. 특히 기존 심의 데이터를 학습한 만큼 과거 판단 기준이 고착화될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이에 대해 정부는 ”AI의 환각과 편향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며 ”사용 기록과 전문위원 의견을 분석해 중립성과 정확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고도화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부는 앞으로 연.예.인을 계속 학습시키면서 확대 적용해나가겠다는 계획입니다. 다른 부처의 R&D 사업 기획과 예산 요구 단계에도 서서히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이죠. 내년쯤엔 이를 통해 각 부처가 신규 사업을 기획하는 초기 단계부터 중복 여부와 타당성을 미리 검토해주는 방향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입니다. 향후 ‘솔라오픈’ 이외의 다른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활용 가능성도 열어두겠다고 했습니다.
업무 효율성은 높이고 행정 부담까지 AI가 줄여주는 시대. ‘연.예.인’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시도가 정부 조직에 어떤 혁신을 가져올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송혜진 조선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