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거주하고 있는 수원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이 있다. 나 역시 전통시장 방문이나 가벼운 운동을 위해, 혹은 외국인 친구가 한국을 찾았을 때 소개할 목적으로 자주 방문한다. 이처럼 화성은 지역 주민들의 여가 공간이자 생활 공간이며, 수원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필수 방문 코스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화성의 옛 모습은 사진과 문헌을 통해 다양하게 알려져 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화성 인근에 거주하던 아빠의 기억 속에도 어린 시절 성벽을 타고 올라가 친구들과 놀고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던 모습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지금의 모습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빠는 수원 화성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아름다운 관광지의 모습이 된 결정적인 계기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이야기했다. 상세한 문헌이 보전된 덕분에 복원 건축물인 수원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고, 등재 이후 성벽 보강 작업과 산책로 개선, 조명 설치 등 다양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전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단순한 유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도 '꼭 방문해야 할 곳'으로 유네스코 유산이 언급되는 경우가 많고, 그 주변에는 기념품 상점과 음식점, 카페 등 다양한 상권이 형성돼 있다. 교통이 불편하더라도 하나의 유산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경우 역시 적지 않다. 인도를 여행했을 때, 아그라의 타지마할 하나를 보기 위해 장시간 이동했던 경험이 대표적이다.
각국의 세계유산위원회는 자국의 훌륭한 유·무형 유산을 관리하고 전승하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유네스코 유산 등재를 위해 노력한다. 유네스코 등재는 세계유산위원회의 회의를 통해 결정되는데, 올해 개최되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가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린다.
올해 7월 19일부터 29일까지 예정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부대행사 7.13.~29.)는 세계유산의 등재와 보존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공식 국제회의다. 특히 1988년 대한민국이 유네스코 국제기구 협약 수락국이 된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회의라는 점에서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다. 개최까지 50일도 채 남지 않은 지금, 전 세계의 시선이 향할 부산을 미리 방문해 왜 부산에서 회의가 개최되는지, 또 이번 회의를 통해 대한민국이 어떤 도약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로 했다.
◆ 대한민국의 유네스코 유산 후보, 부산을 돌아보다
서울역에서 출발해 도착한 부산역은 출장과 여행으로 종종 방문하는 곳이지만, 서울역과 용산역 못지않은 큰 대합실과 멀리서 느껴지는 바다 냄새 때문에 언제나 이질적인 느낌을 받곤 한다. 해양 수도, 대한민국 제2의 도시, 외국인이 많이 찾는 관광도시 등 부산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꽤 많다.
광역시 중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룬 부산이지만, 어쩌면 이러한 발전은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비극인 한국전쟁 당시, 전쟁 시작 후 서울 함락이 빠르게 이루어졌고 우리 국군은 남쪽으로 후퇴를 이어갔다. 대한민국 국토의 대부분이 상실됐을 때, 국군은 낙동강에 최후의 저지선을 세우고 총력 방어에 나섰다.
해양관광도시, 규모가 큰 광역시 정도로 알려진 부산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수도'로의 역할을 수행했다. 현재 국가유산청과 부산시는 피란수도 부산의 열 한곳을 묶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본인 촬영)
부산은 이 시기 피란수도의 역할을 하게 된다. 피란민을 위한 피란촌, 격전지로 향하는 물자 보급과 국군 장병 수송, 포로수용소까지 전쟁 수행과 국가 유지에 필요한 다양한 기능이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부산에 재한유엔기념공원(이하 유엔기념공원)과 평화공원 등이 있는 것도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대한민국을 도와준 여러 나라를 기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피란수도 부산과 관련된 다양한 유산 가운데 유엔기념공원은 더욱 뜻깊은 장소다. 한국전쟁은 유엔의 공식 결의로 파병이 결정된 세계 유일의 전쟁으로, 우리 국군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파병된 유엔군의 희생이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위해 피 흘리며 쓰러진 유엔 소속 장병들 가운데, 국가의 방침이나 유족의 선택에 따라 대한민국에 묻히기를 원한 장병들은 당시 피란수도였던 부산에 안장됐다.
유엔추모공원에 들렀다. 상징 구역에는 한국전쟁 당시 참여한 국가의 국기와 공원에 안장된 국가의 국기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공원 내 상징 구역 (본인 촬영)
유엔기념공원의 위치는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93 (대연동)이다. 도로명에서 알 수 있듯, 유엔군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공간이다. 지금은 매립과 개발이 이루어져 기념공원 주변에 주거단지와 문화구역이 형성돼 있지만, 과거에는 바다와 철도가 가까워 전사자를 기념공원으로 이동하기에 유리했다고 한다.
매일 10시와 16시, UN기 게양식과 하강식이 열리는 유엔기념공원은 피란수도 부산의 핵심 장소 가운데 하나다.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전 세계가 연대한 흔적이자, 모두가 함께 기억해야 할 장소다. 국가유산청과 부산시는 한국전쟁 당시 의미 있는 장소 11곳을 묶어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라는 주제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포함돼 있으며, 2025년 11월 우선 등재 목록으로 선정됐다.
유엔기념공원은 피란수도 한국의 유산 중 '국제사회 연대' 측면에서 중요한 공간으로 이야기된다. 이곳이 단순히 대한민국만의 유산이 아닌 이유이다. 사진은 당시 UN군이 사용했던 깃발 (본인 촬영)
세계유산이 하나도 없는 부산에서 개최되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어쩌면 분열과 경쟁이 만연한 현대 사회 속에서 아픔과 연대를 기억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부는 이번 유네스코 위원회 개최에 맞춰 피란수도 부산 유산을 적극 홍보하고, 방문객들을 위한 관련 유산 투어도 추진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기억하고 세계가 함께 기억할 중요한 근대 유산인 피란수도 부산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부산 시내 곳곳에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를 홍보하는 홍보물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타고 이동했던 부산지하철 내부에서도 관련 홍보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인 촬영)
◆ 지질유산의 새로운 바람, KGA 한국 선언에서 답을 찾다
내가 거주하는 수원을 비롯한 서울과 수도권에서는 아직 세계유산위원회 개최 분위기가 크게 체감되지 않지만, 부산을 오가는 교통편과 부산 시내 곳곳에서는 서서히 행사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KTX 내부 영상에서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홍보가 진행되고 있고, 부산 시내 교통시설과 행사가 열리는 벡스코 주변에서도 다양한 관련 행사가 계획되고 개최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유산위 개최 D-50일을 기념해 KGA학술대회가 벡스코에서 열렸다. 국내외 전문가와 학생, 언론사 등 수백 명이 벡스코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본인 촬영)
지난 5월 27일, 세계유산위원회 개최 D-50일을 기념해 부산 벡스코에서 KGA 보전전략 수립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KGA는 Key Geoheritage Areas의 약자로, 우리말로는 '핵심지질유산지역'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많은 국민은 '세계유산'이라고 하면 문화재나 건축물을 떠올리지만, 세계유산의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다양하다. 대한민국의 세계유산인 한국의 갯벌(2021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반구천의 암각화(2025년) 등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KGA는 전 세계의 지질 관련 유산을 선정·지정하고, 추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나 세계지질공원 등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도록 운영될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 한국에서 열린 KGA 국제학술대회는 전 세계의 지질 전문가들이 대한민국 부산 한곳에 모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을 비롯해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세계보호지역위원회 지질유산 전문가그룹(WCPA GSG) 등 자연환경과 지질 관련 국제단체·연맹·기구의 국내외 전문가들은 물론, 미래 전문가를 꿈꾸는 대학생과 대학원생들까지 부산 벡스코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지난해 아부다비에서 열린 IUCN에서 공식 의제로 채택돼 국제적 논의가 본격화된 KGA는 세계의 지질, 특히 암석과 화석, 광물, 지층과 지형 등 국제적 가치를 지닌 유산들을 체계적으로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도 이러한 내용들이 주요하게 다루어졌다.
KGA회의에는 국내는 물론 해외 전문가들의 발제와 토론, 축사로 가득 채워있었다. 일반 국민인 나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었던 지질유산이지만, 그 의미와 중요성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학술대회는 유튜브 온라인 생중계로도 볼 수 있었다. (국가유산청 유튜브 채널)
특히 개발과 자연재해 등 다양한 요인으로 훼손될 수 있는 지질유산은 한 번 훼손되면 복원할 수 없는 비가역적 유산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한 국가가 아니라 국제사회 공동의 책임 아래 관리해야 한다는 논의가 인상 깊었다. 이는 지질유산의 중요성과 KGA 확대 필요성을 다시금 체감하게 했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지난해 IUCN에서 국가유산청이 주도한 KGA 제도가 공식 의제로 선정되는 쾌거가 있었다고 설명했고, 우경식 WCPA GSG 회장은 설악산과 백두산, DMZ 지역 등 대한민국은 작은 국토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질 다양성을 지니고 있어 KGA 프로그램과 관련해 매우 큰 잠재력을 가진 국가라고 평가했다. 앞으로 KGA가 자리 잡고 확대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시간이었다.
KGA학술대회 후 KGA 한국선언이 공식 채택됐다. 지질유산의 중요성과 국제사회의 연대를 강조한 이번 선언문은 오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전달될 예정이라고 한다. 사진은 KGA한국선언 후 토론 참석자가 한지로 쓰여진 선언문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할 때의 사진이다. (본인 촬영)
이날 국제학술대회 종료 후에는 KGA 한국선언이 공식 채택되며, 전 세계 석학과 전문가들이 KGA의 필요성과 앞으로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뜻을 모았다. 참고로 이날 채택된 KGA 한국선언은 약 50일 뒤 같은 장소에서 열릴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전달될 예정이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KGA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의 지질유산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이제 다음은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부산 회의다. 정부는 물론 행사가 개최되는 부산시는 행사 준비를 위해 만전을 기울이고 있다. (국가유산청)
◆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최지 부산, 세계가 부산으로!
KGA 전문가회의를 통해 세계 지질유산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이어지던 27일 오후, 바로 근처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세계유산대회 준비보고회가 열렸다. 대통령은 모두 발언을 통해 안전과 긴밀한 협력을 최우선으로 하여 행사 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을 당부했다. 특히 이번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와 관련해 "대한민국의 국격이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 준비에 만전을 기해주길 바란다"라며 관련 부처에서 보다 적극적인 준비를 주문하기도 했다.
외교부, 문화체육관광부, 농림축산식품부, 해양수산부, 법무부, 행정안전부, 중소벤처기업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부산광역시까지 이번 세계유산위원회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아홉 개 부처와 지자체가 준비 상황을 보고했고, 대통령은 '안전, 편의, 국격'이라는 키워드를 강조하며 각 부처의 보고를 경청했다.
부산광역시는 이번 행사를 통해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직접 참여할 3000여 명의 외국인 방문객은 물론, 행사 기간 진행될 부대행사와 투어를 즐기기 위해 방문할 내·외국인 관광객까지 합치면 하루 평균 수만 명이 부산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안전과 편의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설명했다.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개최가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올여름, 부산에서 대한민국의 국격이 한 단계 더 높아지길 기대해 본다.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부산 회의 공식 누리집)
대통령은 각 부처의 준비 상황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하면서도, 주요 행사마다 반복되는 바가지요금과 불친절 문제로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써 달라고 당부했다. 행사 기간 동안 방문객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충분히 즐기고 대한민국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해 달라는 대통령의 요청에 참석자들은 박수로 화답했고, 보고회는 마무리됐다.
세계가 다시 대한민국으로 향한다. 지난 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친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한 걸음 더 도약할 이번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7월 19일부터 29일까지 부산 벡스코 일대에서 개최된다. 이번 행사를 통해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와 다양한 유산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우리 국민들은 자부심과 함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숨겨진 유산들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 (보도자료) (국영문 동시배포) 지질유산 보전 위한 국제 약속, 'KGA 한국선언' 발표
☞ (보도자료) 우리나라,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2026년) 유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