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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으로 떠나는 피서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내 입으로 ”나 때는 말이야“ 하며 거드름을 피우기는 죽기보다 싫지만 어쨌든 그때는 정말 그랬다. 이 말인즉 강의시간에 다른 짓을 하고 싶어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내가 죽기보다 싫어하는 일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적성에 맞지 않는 강의를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까짓 일로 세상을 하직할 수 없는 노릇. 그리하여 출석만 하고 강의실을 몰래 빠져나가 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우거나, 빼먹을 수 없는 강의라면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며 전공도서를 보
#K-공감 #정책브리핑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내 입으로 ”나 때는 말이야“ 하며 거드름을 피우기는 죽기보다 싫지만 어쨌든 그때는 정말 그랬다. 이 말인즉 강의시간에 다른 짓을 하고 싶어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내가 죽기보다 싫어하는 일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적성에 맞지 않는 강의를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까짓 일로 세상을 하직할 수 없는 노릇. 그리하여 출석만 하고 강의실을 몰래 빠져나가 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우거나, 빼먹을 수 없는 강의라면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며 전공도서를 보는 척 연기를 했다. 많고 많은 책 중에서도 소설을 즐겨 읽었다. 소설은 강의실에 앉아 있는 나를 부산, 미국 뉴욕, 스페인 산티아고는 물론 저 멀리 우주에까지 데려다주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로는 소설과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것이 우선이었으므로 일 잘하는 법, 주식 투자하는 법, 아파트 사는 법을 다룬 책에 자연히 손이 갔다. 하지만 이따금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소설을 찾았다. 오래간만에 인터넷 서점 소설 코너를 기웃거린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유명 작가가 쓴 소설을 읽고 싶지는 않았다. 문장이야 유려하겠지, 얻을 거리야 있겠지, 이런 책도 읽었다고 사람들 앞에서 뽐을 낼 순 있겠지. 다만 나를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지는 못할 것만 같았다. 오랜 고민 끝에 주문한 책은 ‘양꼬치의 기쁨’이었다. ‘일상의 풍경에 균열을 일으키는 남유하만의 날카로운 호러적 상상력’이라는 책 소개에 마음을 홀랑 빼앗겨 버리고야 만 것이다.

일상에 악몽처럼 스며든 기묘한 이야기들
이 책의 저자 남유하는 SF, 동화, 호러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집필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동화와 호러가 한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었던 것도 잠시, 그동안 내가 출간한 도서를 되짚어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나 역시 가슴을 간질이는 동화는 물론 산문집을 빙자한 유머집을 출간한 전적이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그녀의 출간 이력이 다양해진 이유는 내가 그리했듯 들어오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깊어가는 동지애에 쐐기를 박은 건 사람의 알 수 없는 마음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그녀의 한마디였다. 혹시라도 그녀를 만난다면 뜨거운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김국환의 트로트 ‘타타타’를 들어본 적 있냐고, 그 노래가 나의 애창곡이라고, 특히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라는 구절을 힘주어 부른다고 말이다.

나는 ‘타타타’를 구성지게 부르는 데에서 그쳤지만 그녀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서 공포소설을 쓰기 시작했단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탄생한 ‘양꼬치의 기쁨’에는 평범한 일상에 악몽처럼 스며든 기묘한 이야기들이 수록돼 있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여러 단편소설을 읽다 보면 상대적으로 흥미가 떨어지는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저자가 제 나름대로 고뇌하며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다만 그러한 속사정은 내 알 바가 아니므로 스스럼없이 페이지를 넘겨버리곤 한다. 그런데 남유하는 독자가 이러한 만행을 저지를 틈을 주지 않는다. 언니가 가위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얼굴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아이, 맞선 자리에서 좀비로 변하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여자, 아내를 살해한 죄로 신체 일부를 상실하는 형벌을 받은 남자와 같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니 뒷이야기를 읽지 않고 어떻게 배기겠는가.

다음번에는 어디로 유람을 가볼까
개중에 꼭 하나의 이야기만 추천하라면 ‘양꼬치의 기쁨’을 꼽겠다. 이 단편을 책 제목으로 삼은 걸 보면 저자의 마음도 나와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줄거리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고 싶지만 무릇 호러물은 아무런 정보 없이 읽어야 흥미진진한 법. 호기심이 자극될 만한 구절을 빌려 오는 것으로 소개를 대신해 볼까 한다. ‘‘남편 양꼬치’, 비닐 코팅된 메뉴판 위에 손으로 대충 적은 상호가 눈에 들어왔다. (중략) 그러니까 ‘남편 양꼬치’라는 거죠? 아내가 물었다. 네. 주인아주머니가 대답했다. 그래서 고기를 살 수 없군요. 살 수 있는 고기가 아니니까. 메뉴판을 열어보지도 않은 아내가 주인아주머니를 보며 말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친근한 눈빛이 돼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게도 제 남편은 하나뿐이니까요. 재혼은 안 하세요? 아직 예정이 없네요. 그럼 제 남편은 어떨까요? 남편이라면 다 괜찮답니다. 그럼 부탁합니다.’

열 편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다시 현실이다. 침대에 늘어지게 드러누워 여독을 풀고 싶지만 그런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노트북이 든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어노는 놀이터를 지나, 곱게 단장한 남녀가 맞선을 보고 있는 카페에 들러 음료 한 잔을 산 다음, 청정 호주산 양고기를 고집하는 양꼬치집을 거쳐 일터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온종일 꼼짝없이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일거리를 해치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절로 아득해진다. 그럼에도 발걸음이 무겁지는 않다. 네모난 소설책을 펼치기만 하면 어느 곳으로든 훌쩍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다음번에는 어디로 유람을 가볼까. 이왕이면 남유하 가이드, 아니 작가의 안내에 몸을 맡길 셈이다. 나날이 무더워지는 날씨에 귀신의 집 구경만큼 시원한 일은 또 없을 테니 말이다.

이주윤

여러 작가의 문장을 따라 쓰다 보니 글쓰기를 업으로 삼게 됐다.

‘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문해력’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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