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당진·예산·홍성 일대를 잇는 내포문화숲길은 찬란한 백제 문화와 천년 종교의 흔적을 따라 걷는 장거리 순례길이다. 서산 가야산권을 중심으로 불교순례길, 천주교순례길, 백제부흥군길, 역사인물길, 동학길 등 총 다섯 개 주제로 구성된 길의 총연장은 320㎞에 이른다.
길의 표정은 대체로 온화하다. 급한 오르막보다 숲과 마을을 잇는 평탄한 구간이 많아 천천히 걷기에 좋다. 그러나 이 길이 품은 역사는 결코 간단치 않다. 가야산을 관통하는 도로 건설 계획이 발표되자 지역주민과 수행에 정진하던 스님들이 산을 지키겠다며 ‘걷기 시위’에 나선 것이 숲길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발로 지켜낸 산과 길은 ‘내포문화숲길’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규모와 완성도를 인정받아 지방자치단체 조성 숲길 가운데 처음으로 ‘국가숲길’에 지정되기도 했다.
‘내포’라는 이름이 다소 생소할 수 있다. 바다나 호수가 내륙 깊숙이 들어와 포구가 형성된 곳을 뜻한다. 조선시대 후기 지리서 ‘택리지’에서 이중환은 ”가야산 앞뒤 열 고을을 내포라 한다“며 충청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으로 꼽았다. 비옥한 평야와 풍부한 수산물, 활발한 교역 덕분에 상권이 발달해 시장만 43곳에 이를 정도로 번성했다고 한다.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곳에는 문화도 꽃핀다. 숲길 일대에는 한때 100여 개의 암자가 자리했다고 전해진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이 원효암이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지만 전설에 따르면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내포불교순례길 1코스는 이 원효암터를 지난다. 그래서 ‘원효대사 해골물길’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전체 길이는 14.4㎞. 내포문화숲길 예산센터를 출발해 원효봉 기슭을 오른 뒤 덕숭산의 고찰 수덕사까지 이어진다. 천년 불교의 흔적을 따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성찰의 길이다.
원효와 의상, 송시열과 흥선대원군을 만나는 길
들머리부터 볼거리가 넘쳐난다. 돌기둥처럼 생긴 고려시대 석불 상가리미륵불이 길손을 맞고 인근에는 남연군묘가 있다. 남연군의 아들인 흥선대원군은 이곳이 명당이라는 풍수 해석에 따라 원래 있던 사찰과 석탑을 철거하고 부친을 안장했다고 한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도굴하려다 실패한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계곡을 따르는 길은 또 하나의 유산을 보여준다. 가야구곡 중 제4곡인 석문담이다. 우암 송시열이 풍류에 취해 새겼다는 ‘醉石(취석)’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이어 철새와 텃새가 머무는 옥계저수지를 스치듯 지나간다.
소나무 숲을 따라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된다. 길은 대체로 편안하지만 원효봉(605m) 9부 능선까지 오르는 만큼 마냥 쉽지는 않다. 구불거리는 오솔길을 가다 보면 갑자기 시야가 확 열리는 공간이 나타난다. 바로 원효암터다. 내포문화숲길 스탬프 우체통이 반갑게 맞아준다. 인근의 은술샘은 의상암터의 금술샘과 짝을 이룬다. 물이 많을 때면 각각 금빛, 은빛을 띤다고 한다.
다만 해골물 전설을 떠올리며 동굴을 기대했다면 조금 의아할 수도 있다. 원효암터엔 이렇다 할 동굴이 없다. 토굴은 더 위쪽에 있다고 하지만 길이 따로 있지 않아서 찾기가 쉽지 않다. 원효의 ‘일체유심조’ 정신을 떠올리며 마음속에서만 상상해 보는 편이 좋겠다.
덕이 모이는 곳, 수덕사
원효암터에서 의상암터로 이어지는 구간은 이 코스의 하이라이트다. 예산군 일대 평원과 수암산~용봉산의 마루금, 충남도청이 있는 내포신도시의 스카이라인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막힘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힐 만한 조망 바위도 도처에 있다.
원효봉을 내려오면 편안한 마을길을 따라 천년고찰 수덕사로 향한다. 수덕사 대웅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예산에서 가장 큰 사찰로 한국 불교 역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괘불탱, 삼불좌상, 석탑 등 수많은 문화유산을 품고 있어 돌아보는 데 꽤 시간이 걸린다. 서두르지 말고 충분히 머물기를 권한다. 이곳은 덕숭(德崇)과 수덕(修德), 덕산(德山), 3덕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현우 월간<산> 기자
교통
539번 버스가 예산터미널을 출발, 삽교역을 거쳐 내포문화숲길 예산센터 인근 상가리 정류장까지 간다. 하루 2회(9:10, 14:50) 운행. 수덕사는 홍성이나 예산 방면으로 가는 290~991번대 버스가
수시 운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