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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와 도시는 닮아간다

반도체는 미래의 도시를 닮아간다. 반도체의 역사는 사실상 ‘하나의 반도체칩 안에 얼마나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을 수 있는가’의 역사다. 이를 반도체에서는 집적도라고 한다. 도시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도시의 역사는 인구 증가에 맞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효율적으로 그리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 것인가의 역사다. 마치 정밀한 집적회로(IC)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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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는 미래의 도시를 닮아간다. 반도체의 역사는 사실상 ‘하나의 반도체칩 안에 얼마나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을 수 있는가’의 역사다. 이를 반도체에서는 집적도라고 한다. 도시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도시의 역사는 인구 증가에 맞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효율적으로 그리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 것인가의 역사다. 마치 정밀한 집적회로(IC)처럼.

나는 중학교 때 서울 마포구 망원동으로 이사해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당시 망원동은 서울의 끝이었다. 높은 건물도 없었다. 우리 집에서 바라보면 멀리 합정동 양화대교 언저리까지 훤히 보였다. 그 허허벌판은 계절에 따라 당근밭과 시금치밭으로 변했다. 우리 집은 지금의 망원시장 근처였다. 내가 살던 시절의 망원시장은 장터 같은 분위기였다. 얼마 전 제자들이 망원시장에서 막걸리 한잔하자고 해서 오랜만에 내가 살던 동네를 다시 찾았다. 실로 35년 만이었다.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보려 했지만 비슷비슷한 건물로 가득 차 있어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동네 끝에 있던 허름한 시장은 거대한 상권으로 변해 있었다. 근처 합정동도 그랬고 내가 유학에서 돌아와 살던 홍대 근처 역시 마치 반도체 집적회로처럼 몰라볼 정도로 ‘3차원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도쿄 선언’이 만든 미래
1974년 설립된 한국반도체는 소형 전자시계용 IC칩을 해외에 수출하며 한국 반도체 산업의 첫 수출 시대를 열었다. 당시 세계 전자산업은 전자시계, 계산기, 라디오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설계 기술, 제조 장비, 공정 경험이 모두 부족했던 우리는 해외에서 기술을 도입해야 했다. 생산 역시 단순 조립 중심의 저집적 IC가 대부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시작은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1974년 말 경영난을 겪고 있던 한국반도체를 삼성전자가 인수한다. 삼성전자는 1970년대 초 세계적인 오일쇼크로 경영난을 겪자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전자 부문을 살릴 수 있는 길은 핵심 부품인 반도체의 자급이라고 봤다. 1974년 12월 파산 직전에 몰린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이미 미국과 일본은 반도체 산업이 성장 궤도에 오른 지 27년이나 지난 뒤였다. 늦은 출발이었다.

10년 후인 1983년 2월 8일 삼성전자 이병철 회장은 일본 도쿄 오쿠라호텔에서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본격 진출한다는 내용을 공식 선언한다. 이를 ‘도쿄 선언’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 자리에서 ”반도체는 미래 산업의 쌀“이라고 말하며 ”지금 반도체를 하지 않으면 삼성의 미래는 없다“라고 단언했다. 반도체를 만들지 못하면 전자산업 전체의 주도권을 잃는다고 본 것이다. 그 결과물로 삼성전자는 1983년 64KD램 개발 계획을 발표했고 1년도 안돼 자체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이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세계 메모리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반도체 IC칩과 D램의 역사는 인류가 인간의 뇌처럼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방법을 어떻게 발전해나갔는가의 역사이기도 하다. IC칩은 두뇌를 작게 만들었고 D램은 기억을 확장해왔다.

IC칩은 수많은 전자 부품과 연산 기능을 손톱만 한 반도체 안에 집적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컴퓨터의 두뇌를 극도로 작고 빠르게 만든 기술이다. 이 기술 덕분에 과거 건물 크기였던 컴퓨터가 손바닥만 한 크기로 줄어들 수 있었다. 앞으로 반도체는 인공지능(AI)과 우주산업 같은 미래 기술의 핵심이 될 것이다.

미래의 AI는 인간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순간적으로 학습하고 계산해야 한다. D램은 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저장하고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AI 시대에는 메모리의 속도와 용량이 곧 컴퓨팅 성능이 된다. 과거 D램의 경쟁이 얼마나 많이 저장하느냐에 있었다면, 미래 D램의 경쟁은 얼마나 빠르게 AI에 데이터를 공급하느냐에 달려 있다. 특히 고대역폭 메모리(HBM) 같은 차세대 D램은 AI 반도체의 성능을 결정하는 핵심 기술이다.

나는 지금 서울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 서촌의 경계에 자리한 산중턱 종로구 옥인동에 살고 있다. 뒷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인왕산 산책길 초입이다.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면 그 산책길을 걷곤 한다. 어두운 산길 오른쪽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살아 움직인다. 조금만 올라가면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무무대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에 서면 ‘서울이 이렇게 멋진 야경을 가진 도시였구나’ 하고 새삼 놀란다. 멀리 123층의 롯데월드타워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남산 N서울타워가 보인다. 밤이 돼도 꺼지지 않는 불빛들은 서울의 모든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서울이 3차원 반도체 집적회로같이 느껴진다.

만약 1983년 그때 반도체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43년이 지난 지금, 반도체는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산업 구조에서 전체 수출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는 산업이 되었다. 그야말로 우리가 먹고사는 ‘쌀’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시기가 있다. 어찌 보면 순간순간의 정확한 판단이 미래의 흐름을 결정한다. 결정에는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진행형 속에 양자역학의 50:50의 양자 확률처럼 분기점을 가진다. ”반도체는 미래 산업의 쌀“이라는 선언 이후 여기까지 오는 데 수많은 사람의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10년 후 반도체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까. 이제 반도체와 결합한 AI 시대가 열리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또 한 번의 ‘선언’이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이기진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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