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신 폴리페놀팩토리 대표이사 겸 KAIST 교수
미국 아마존 조기 완판. 일본 라쿠텐 론칭 당일 K-뷰티 카테고리 1위, 대만 모모홈쇼핑 론칭 당일 완판. 국내 한 스타트업이 만든 샴푸가 미국과 아시아 주요 시장에서 잇따라 성과를 거두며 글로벌 뷰티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4월에는 화장품의 본고장인 프랑스 파리 프랭탕백화점까지 입점했다.
주목할 점은 제품 자체보다 제품을 가능하게 한 원천기술에 있다. 색조와 스킨케어 중심으로 성장해온 K-뷰티가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경쟁력을 구축하며 영역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화제의 샴푸를 만든 이해신(52) 카이스트(KAIST) 화학과 교수 겸 폴리페놀팩토리 대표이사가 있다. 폴리페놀팩토리는 카이스트 교원 창업 스타트업이다.
이 교수는 스스로를 ‘폴친자(폴리페놀에 미친 자)’로 칭할 만큼 ‘폴리페놀’ 연구에 몰두해왔다. 폴리페놀은 식물 등이 외부 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생성하는 천연물질이다. 카테킨, 탄닌, 레스베라트롤, 안토시아닌 등이 대표적이며 종류만 1000여 종에 이른다.
폴리페놀의 대표적인 특성은 강력한 접착력이다. 거센 파도 속에서 홍합이 바위에 단단히 붙어 있는 것도 홍합의 접착 단백질에 포함된 폴리페놀의 일종인 카테콜 덕분이다. 이 교수는 홍합의 수중 접착 원리를 세계 최초로 규명해 관련 연구를 국제학술지 ‘네이처’ 표지 논문으로 발표한 데 이어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도 게재했다. 해당 논문의 인용 횟수는 1만 회를 넘어섰다.
이 교수는 폴리페놀의 접착력을 응용해 의료용 지혈제를 만든 데 이어 일상생활의 다양한 불편함을 해결하겠다는 목표로 2023년 폴리페놀팩토리를 창업했다. 폴리페놀 기반 헤어케어 제품은 폴리페놀팩토리의 첫 번째 상용화 사례다. 6월 8일에는 제주 해조류에서 추출한 해양 미세조류 유래 PDRN(폴리디옥시리보뉴클레오티드) 기술을 공개해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PDRN 성분이 폴리페놀과 결합해 물로 헹군 뒤에도 모발과 두피 표면에 코팅되듯 남아 탈모 효과가 큰 것으로 확인되면서 탈모인들로부터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는 ”과학이 논문이나 실험실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삶을 바꾸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헤어 케어 제품을 넘어 안구건조, 관절 관리 등 ‘물이 존재하는 모든 헬스케어 영역’으로 확장하고 싶다는 이 교수의 도전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교수라는 안정적인 길을 두고 ‘창업’에 도전한 계기는.
보통 연구자는 박사학위 취득 뒤 포스닥 과정을 거치며 현장 연구 역량을 쌓는다. 내게는 이 시기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포스닥 시절 지도교수가 코로나19 백신 제조사 ‘모더나(Moderna)’의 공동창업자인 로버트 랭거(Robert Langer) 교수였다. 랭거 교수의 연구실은 상주 연구원만 100명이 넘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특허와 논문을 보유하고 2조 원대의 자산을 보유한 연구자이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가 창업한 기업만 40여 개에 달한다. 모더나 역시 그가 만든 수많은 창업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 환경에 있다 보면 창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안 들 수가 없다.
한국에 돌아와 2009년 KAIST에 부임한 뒤 2010년 첫 기술 창업에 나섰다. 당시 개발한 의료용 지혈제 기술로 일군 기업을 코스닥에 상장하고 매각까지 하면서 기술 사업화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이후 임플란트 기업의 사외이사 등을 맡으며 산업 현장 감각을 익히다 2023년 두 번째 창업인 폴리페놀팩토리를 설립했다.
창업가로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초기 1년간 제품화 과정이 가장 어려웠다.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나’, ‘시장이 필요로 하는 제품인가’ 끊임없이 자문했다. KAIST 이름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부담도 적지 않았다.
제품을 출시한 이후에는 시장에서 성과를 숫자로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이 컸다. 시장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인터뷰가 나가면 업계 관계자들이 곧바로 기술과 제품을 분석했고 일부 대형 제조사는 우리 제품의 상세 페이지나 콘셉트를 그대로 따라 하는 일도 발생했다.
현재 회사는 30명 규모로 성장했다. 연구 인력은 전체의 3분의 1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연구 인력을 무작정 늘리기보다 제품군 다변화에 집중하고 있다. 지금은 헤어 제품을 넘어 눈 건강과 구강 관리 분야까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자연에서 배운다(Biomimicry)’는 철학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인류가 만든 수많은 인공물질은 대부분 석유에서 나왔다. 하지만 최근의 중동 전쟁과 공급망 위기를 겪으며 석유 기반 산업의 한계를 체감하고 있다. 석유화학 제품으로 구현할 수 있는 물성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
반면 자연은 훨씬 강인하고 정교하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바위에 단단히 붙어 있는 홍합처럼 자연은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 대한 답을 갖고 있다. 그 핵심에 폴리페놀이 있다. 모든 생명체 중에서도 특히 식물은 종류가 다를 뿐 모두 폴리페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석유화학이 도달하지 못한 강력하고 다양한 물성의 해답을 자연에서 찾고 이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나의 연구 철학이다.
CES 2026에도 참가했다. 글로벌 시장의 최전선에서 느낀 글로벌 뷰티 시장의 변화는.
한마디로 ‘인공지능(AI)’을 빼면 ‘뷰티’라고 할 정도였다. 글로벌 뷰티 시장은 이제 철저히 과학과 기술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세계 헤어 시장 1위 기업 로레알도 모발 손상을 줄이는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기존 180~200도 수준이던 고데기 온도를 LED 기술 등을 활용해 100도 초중반까지 낮추는 기술을 선보였다.
피부과 시술 장비 역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마이크로 니들(Micro-needle, 미세 바늘) 같은 장비도 니들의 간격과 침투 깊이를 정밀하게 제어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글로벌 뷰티 시장은 철저하게 효과를 담보로 하고 ‘숫자로 증명이 가능한 과학’을 가장 중요하게 평가하는 추세다.
폴리페놀은 어떻게 헤어케어 기술로 이어졌나.
폴리페놀은 기본적으로 단백질과 잘 결합한다. 의료용 지혈제를 개발하며 배웠다. 머리카락은 단백질 덩어리다. 일반적인 성분은 샴푸 후 물로 씻어내면 대부분 함께 씻겨 내려가지만 폴리페놀은 다르다. 분자 단위로 미세하게 쪼개 모발에 적용하면 샤워기 물살에도 씻겨 나가지 않고 모발 표면에 단단히 달라붙어 코팅층을 형성한다. 제품 개발 과정은 쉽지 않았다. 효과를 높이기 위해 폴리페놀 함량을 늘리면 머리카락이 지나치게 뻑뻑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접착력이 강해 모발끼리 서로 달라붙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샴푸 기능뿐 아니라 스타일링 효과까지 고려해 기술을 조정했다.
헤어케어를 폴리페놀팩토리의 첫 상용화 분야로 선택한 이유는.
탈모는 외형적 변화를 넘어 개인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겉으로는 건강해 보여도 공황장애나 우울증이 삶 전체를 흔들 수 있듯 탈모 역시 마찬가지다. 주변에서 ‘머리가 많이 빠졌다’는 말을 듣기 시작하면 자신감이 떨어지고 외출을 꺼리게 된다. 사회생활 기피와 심리적 위축으로 이어져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탈모는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가치가 있는 문제다.
폴리페놀 기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미래는.
단순히 좋은 샴푸를 만드는 데 머물고 싶지 않다. 뷰티와 헬스케어 영역에서 기술력으로 인정받는 기업이 되는 것이 목표다. 폴리페놀 연구를 바탕으로 안구건조증 점안액, 구강청결제, 관절염 치료 보조제처럼 ‘물이 존재하는 모든 의료·헬스케어 영역’으로 제품을 다변화해 나갈 계획이다.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 과학·기술 생태계에 성공적인 선순환 모델을 제시하고 싶다. 스포츠계에서 손흥민 선수 한 명이 수많은 축구 꿈나무를 만들었듯 과학계에서도 성공한 창업가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인재들이 기술 창업을 꿈꾸고 도전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서하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