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오후의 산책길이 가볍다. 바람도 노란 햇살도, 마른 길도, 물이 오르고 움을 틔우기 시작한 나무도 생기가 차오르고 있다. 그래도 3월의 밤공기는 차다. 봄은 서로 다른 공기가 강하게 충돌하는 계절이라 바람도 심하다. 대기운동이 활발해 밤낮의 온도 차가 커진다. 열역학적으로 보면 매우 불안정한 상태다. 겨울은 이미 떠났지만 봄이 완전히 도착하지 않은 상태다.
나는 인왕산 중턱 옥인동에 살고 있다. 이곳에 사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산책이다. 오후 해 질 녘 산책길을 따라 걸으면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고 남산이 정면에 펼쳐진다.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마치 깊은 산속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나에게 오후의 산책은 한 잔의 아페리티프(aperitif·식전주)와 같다. 하루를 닫고, 온전히 나와 함께하고, 저녁을 열고, 하루의 마지막 장을 여는 의식이다.
아인슈타인은 1933년 나치를 피해 독일 베를린을 떠나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산책을 즐겼다. 헝클어진 머리에 코트 차림, 때로는 파이프를 들고 천천히 걷는 아인슈타인의 모습은 동네 사람들에게 친근한 풍경이었다. 이웃들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걸을 때 가장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 ”나는 생각할 때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걷다가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라는 말처럼 아인슈타인은 연구실 책상보다 산책길에서 더 깊은 사유를 이어가곤 했다.
시간은 정말 흐르는 걸까?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에서 가까이 지내던 괴델과도 산책을 즐겼다. 쿠르트 괴델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수학자였으며 철학적 관심을 통해 물리학, 특히 일반상대성이론을 깊이 연구했다. 괴델은 물리학에도 중요한 궤적을 남겼다. 1949년 그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방정식의 풀이 가운데 하나를 제시했다. 그의 이름을 딴 괴델 우주(Gödel universe)다. 이 풀이에서는 시공간이 특별하게 휘어 이론적으로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시간 경로가 존재할 수 있다. 마치 영화 ‘백 투 더 퓨처’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간은 정말 흐르는 것일까? 괴델은 시간의 흐름이 물리적 실재라기보다 인간의 인식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시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남겼다.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든 아인슈타인과 그 방정식의 독특한 풀이를 제시한 괴델, 두 천재의 산책은 시간과 존재를 함께 사유하는 두 정신의 동행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괴델과 함께 집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특권 때문에 연구소에 나갔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산책은 그에게 지적 탐구를 넘어 삶의 기쁨이기도 했다.
예전에 병원에 한 달간 입원한 적이 있다. 바이러스 감염으로 심각한 상태까지 갔다가 서서히 회복되는 동안 침상에 누워 지냈는데 몸무게가 10㎏이나 빠졌다. 그때 병원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가장 간절히 바랐던 것은 산책과 소머리국밥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편한 신발을 신고 강변을 걷고 싶었다. 일요일 아침 서촌 통인시장의 단골집에서 소머리국밥을 먹으며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하고 싶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걷는다는 일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새삼 되새기게 된다.
평범함의 위대함
우주에서는 지구에서처럼 산책할 수 없다. 이유는 중력이 없기 때문이다. 중력이 없으면 걷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발로 바닥을 밀어도 몸이 쉽게 떠오르기 때문에 걷는 대신 떠다니게 된다. 이런 이유로 우주에서 지내면 한 달 만에 근육 감소는 최대 20%, 골밀도는 약 1~2%가 감소한다. 심장 기능 역시 약해진다. 이 때문에 우주비행사는 몸을 벨트로 고정한 채 특별한 운동장치를 사용해 근력을 단련한다.
영국 우주비행사 팀 피크는 2015년 12월부터 2016년 6월까지 약 186일 동안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장기 체류했다. 우주선을 타고 6개월 동안 지구를 약 3000회 이상 회전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지구로 돌아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족과 함께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것을 정말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숲길을 걷고 바람과 공기를 느끼고 무엇보다 ‘비 냄새’를 맡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 ‘비 냄새’를 그리워한다는 말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는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았을 때 지구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장 그리운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이었다고 했다. 그는 우주의 위대함보다 지구의 평범함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 틀림없다.
봄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신발을 신고 산책을 나서는 일은 지구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한순간이다. 만약 비가 온다면 그때 그 비 냄새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역시 우주 어디에서도 대신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경험일 것이다.
이기진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