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1058m)에는 속세를 벗어난 듯한 고요함이 깃들어 있다. 이름 그대로 ‘속세를 떠나는 산’이라는 뜻을 품은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수행자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에 걸쳐 있는 속리산은 1970년 우리나라 여섯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속리산은 예로부터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산행의 시작점이자 대표 명소인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됐다. ‘부처의 법이 머무는 절’이라는 이름처럼 오랜 세월 한국 불교의 중심 도량 역할을 해왔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산사·한국의 산지승원)에 등재됐다.
법주사는 신도보다 여행객의 발길이 더 잦다. 경내 곳곳에 국보와 보물이 자리해 절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처럼 느껴진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높이 33m의 금동미륵대불이다. 한때 동양 최대 규모로 꼽히던 이 불상은 신라시대에 처음 조성됐으나 유실과 복원을 거듭했고 오늘날에는 청동 위에 순금을 입힌 모습으로 서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탑 형식의 목조건축물인 팔상전은 산 능선과 어우러져 단아한 실루엣을 완성한다. 이 밖에도 국보 3점과 보물 13점이 천년 사찰의 시간을 지키고 있다.
세속의 번뇌를 씻어내는 숲길
법주사로 향하는 길은 그 자체로 마음을 고르게 한다. 매표소에서 사찰 입구까지 이어지는 ‘오리숲길’은 약 2㎞(5리)에 걸쳐 소나무가 이어지는 길이다. 사계절 내내 은은한 솔향이 숲을 채운다. 법주사에서 세심정까지 이어지는 ‘세조길’은 조선 세조가 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을 찾았을 때 걸었던 길을 따라 복원한 산책로다.
속리산을 이야기할 때 세조와 관련한 전설은 빠지지 않는다. 1464년 물 좋기로 이름난 곳을 찾아다니던 세조가 법주사로 향하던 길이었다. 가마가 나뭇가지에 걸릴 듯하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렸고 이를 기특하게 여긴 세조가 벼슬을 내려 ‘정이품송’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산 입구에 서 있는 높이 15m의 소나무는 품위 있는 자태를 지키고 있다.
문장대에도 세조와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조의 꿈에 나타난 인물이 운장대에 오르라고 일렀고 다음 날 그곳에서 ‘삼강오륜’을 적은 책을 발견해 하루 종일 읽었다는 것이다. 이후 이름이 ‘문장대’로 바뀌었다고 한다.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죽음으로 몰았던 왕에게 도덕의 책이 놓여 있었다는 점에서 이 산이 세조에게 어떤 뜻을 건네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해석도 남아 있다.
바위 왕관 위에 서는 순간
문장대(1054m)는 정상인 천왕봉(1058m)보다 더 많은 이가 찾는다. 비교적 오르기 수월한 데다 거대한 바위 위에 놓인 철계단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트인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바위로 만든 왕관 위에 올라선 듯한 기분이다. 천왕봉의 웅장함도 인상적이지만 문장대가 선사하는 장쾌함은 한층 더 강렬하다.
문장대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은 기암괴석의 연속이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물개바위, 등을 돌린 원숭이를 닮은 바위, 도롱뇽을 떠올리게 하는 바위가 이어진다. 신라 진평왕의 왕비 마야부인이 기도를 올렸다는 입석대와 임경업 장군이 수련했다는 경업대도 우뚝 솟아 있다.
문장대에 서면 왜 이곳을 ‘왕의 경치’라 부르는지 알게 된다. 주변의 산들은 마치 신하처럼 낮게 엎드려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고 그 흐름은 먹의 농담으로 그린 수묵화처럼 부드럽게 번져간다. 서쪽 보은의 들판과 동쪽 상주의 깊은 골짜기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압도적이면서도 고요하다. 두어 시간의 산행으로 쌓인 피로는 어느새 잦아들고 마음을 채우던 소음과 집착도 자연스레 멀어진다.
조선의 문장가 임제는 속리산을 떠나며 이렇게 적었다.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떠나는구나(山不離俗 俗離山).“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달라지는 것은 스스로를 내려놓는 우리의 마음이다. 문장대 위에 서서 바람을 맞다 보면 마음속 번뇌가 조용히 자리를 비우는 순간을 만난다.
신준범 월간<산> 기자
알고 가면 좋은 정보
추천 코스: 법주사~문장대~신선대~경업대~관음암~비로산장~법주사 16㎞ 5~6시간 소요.
산행 길잡이: 주차장에서 법주사 지나 세심정까지 3㎞는 평지에 가깝다. 전체 산행거리에 비해 가파른 구간은 4㎞ 정도에 불과하므로 지구력만 있다면 초보자도 가능하다.
신선대휴게소: 국립공원은 원칙적으로 능선에 음식을 판매하는 산장이나 식당이 없지만 속리산은 예외다. 문장대에서 신선대 방면 ‘신선대휴게소’에서 물, 커피, 라면 등의 음식을 판다. 법주사 소유의 땅이고 국립공원 지정 이전부터 임대로 운영되던 곳이다.
비로산장: 국립공원 내에서 숙박 가능한 몇 안 되는 민간 숙소다. 숲 향기 짙은 계곡에 있으며 시설은 노후됐다. 피톤치드와 맑은 물에 발 담그는 것이 목적인 사람에게 알맞다.
산행이 풍요로워지는 비법 최고의 전망대인 문장대, 경업대에서 충분히 시간을 갖고 경치를 음미하고 좁은 바위틈을 지나면 나타나는 은밀한 명소 관음암에 들른다. 법주사를 구경하는 데만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리므로 전체 산행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
대중교통: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법주사 입구의 속리산터미널까지 1일 3회(07:05, 10:30, 17:30) 운행한다. 2시간 30분 걸리며, 요금은 1만 8700원. 속리산터미널에서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행 버스는 1일 4회(07:25, 12:20, 14:20, 16:20) 운행한다. 3시간 10분 걸리며 요금은 1만 87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