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열린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Hope)’는 비록 수상엔 실패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관심과 찬사를 받았다. 영국의 유력 매체 ‘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는 ”쉼 없이 몰아치는 곤조 에일리언 전투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non-stop gonzo alien-battling is top-quality entertainment)“라며 상찬했다. 나는 처음에 여기 포함된 ‘곤조(Gonzo·파격적이고 거침없는)’가 일본어 유래 속어인 ‘곤조(こんじょう·根性·끈질긴 고집이나 특유의 근성)’인 줄 알았다. 파격적이고 거침없는 근성이라 해도 나홍진 영화나 우리 민족의 개성에 꽤 어울리는 셈이니 내 생각이 오해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브래드쇼는 평론의 말미에 오늘날 K-컬처의 인기를 ‘K-집착(K-obsession)’이라는 말로 고쳐 불렀다. 며칠 지나지 않아 최고 권위의 대중음악 시상식인 아메리칸뮤직어워즈(AMA)에서 방탄소년단(BTS)과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이 주요 부문을 휩쓸었다.
이러한 문화적 K-집착 현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문화 시장의 거시경제적 흐름과 플랫폼 다이내믹스(Platform Dynamics)를 이해해야 한다. 과거 서구 미디어 재벌이 독점하던 문화 패권은 넷플릭스를 필두로 한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OTT)과 누리소통망(SNS)으로 넘어갔다. 20세기의 거대 매체를 21세기의 거대 매체가 대신한 것처럼 보이지만 플랫폼은 과거 미디어 재벌과 달리 소비의 다양성을 증폭하는 독특한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K-집착이 거시경제적 안전판이 될 수 있을까?
글로벌 OTT는 거대한 투자로 한국 창작자들의 상상력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콘텐츠를 전 세계 190여 개국에 동시다발적으로 직배송해 한국 콘텐츠의 노출 기회를 높이고 결과적으로 세계인의 콘텐츠 소비 다양성을 증가시켰다. 여기에 틱톡, 유튜브 쇼츠 등 숏폼 중심의 SNS는 강력한 바이럴 엔진으로 작동하며 일방향적 송출을 넘어 전 세계 유저들이 능동적으로 밈(Meme)을 생산하고 향유하는 ‘다양한 선택 네트워크’를 구축해냈다.
그렇다면 경제 고도화로 인한 성장률이 ‘한계생산 체감의 벽’에 부딪힌 한국 경제에 오늘날의 문화적 K-집착이 거시경제적 안전판이 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화산업 단일 규모만으로는 기존 제조업의 둔화를 온전히 상쇄하기 어렵다. 하지만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강력한 혁신의 촉매제’ 역할은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
문화 상품의 핵심인 지식재산권은 디지털 네트워크를 타고 비선형적으로 확산하며 한계비용을 ‘0’에 수렴한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강력한 팬덤의 연결망이 K-뷰티, 패션, 첨단 가전, 인바운드 관광 등으로 번져나가는 거대한 파급 효과다. 문화적 K-집착은 타 산업의 마진율을 끌어올리는 훌륭한 보조 엔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긍정적 시나리오 이면에 드리운 ‘플랫폼 종속성’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다. 글로벌 빅테크가 제작비를 제공하는 대신 원천 지식재산권(IP)과 핵심 자산인 ‘수용자 데이터’를 독점하는 하청 기지화는 성장의 결실 자체로부터 우리가 소외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한국의 영광이자 이 불길한 시나리오의 전조이기도 하다.
첨단기술 혁신이 K-컬처와 화학적 결합을 이룰 때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산업 정책의 대전환이 요구된다. 국가 주도의 대규모 IP 펀드와 민간 자본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파이낸싱을 통해 창작자가 원천 IP를 방어하고 방영권만 분할 판매하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글로벌 OTT의 데이터 블랙박스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소셜 데이터 분석과 네트워크 방법론을 활용해 글로벌 대중의 취향 지형도를 스스로 정량화하는 데이터 주권의 확보가 필수적이다.
다행히 국민주권정부의 ‘K-컬처 300조 원’과 ‘소버린 인공지능(AI)’ 정책은 이 문제를 정확히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정책 목표는 따로 달성될 수 없다. 이들을 ‘과학기술 기반 K-컬처’라는 단일 틀로 종합하고 발전시키는 지적·경제적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표는 대중문화와 엔터테인먼트 영역에 안주하는 문화적 K-집착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2045년 우리는 광복 100주년을 맞는다. 한 세기 동안 우리의 분투는 진정한 의미의 문화적·정신적 독립을 완성하는 ‘K-르네상스’를 향해 있다. 이를 위해 현재 우리는 과학, 기술, 그리고 국제정치 영역으로 파급력을 확대하는 중이다. AI, 우주항공, 차세대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한국이 주도하는 혁신이 K-컬처와 화학적 결합을 이룰 때 오늘날의 K-집착은 전 세계인이 신뢰하고 동경하는 ‘국가적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 2045년, 문화와 과학기술을 결합해 인류의 보편적 미래를 선도하는 진정한 ‘K-르네상스’가 전 세계의 표준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이원재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