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자산 산업의 중심축이 규제 논의를 넘어 실제 서비스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이 제도 정비에 무게를 두는 사이, 동남아시아는 해외송금과 금융 접근성, 통화주권 등 지역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디지털 자산을 실생활에 접목하는 사례를 빠르게 늘려가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결제와 실물자산 토큰화, AI 기반 금융 서비스까지 등장하면서 동남아가 글로벌 디지털 금융 혁신의 실험장이자 상용화 무대로 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글로벌 블록체인·AI 전문 벤처캐피털 해시드의 정책 싱크탱크 해시드오픈리서치(HOR)는 태국 금융지주회사 SCBX와 공동으로 ‘필요가 만든 제도: 동남아시아 디지털 자산의 선택과 실제’ 보고서를 발간하고 이 같은 흐름을 조명했다. 보고서는 지난 5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동남아시아 블록체인 위크(SEABW) 2026’에서 진행된 기조연설과 비공개 라운드테이블 논의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해시드오픈리서치·SCBX, SEABW 2026 논의 담은 ‘필요가 만든 제도- 동남아시아 디지털 자산의 선택과 실제’ 보고서 발간 (자료 제공: 해시드오픈리서치)
스테이블코인부터 토큰화까지…현실 문제 해결하는 디지털 금융
보고서는 동남아 6개국의 디지털 자산 전략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싱가포르와 태국, 말레이시아는 자국 통화 기반의 디지털 금융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싱가포르달러(SGD) 스테이블코인 제도를 확대하고 있으며, 태국은 중앙은행 규제 샌드박스를 활용해 바트화 기반 스테이블코인과 프로그래머블 결제를 시험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도 링깃 기반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예금 도입을 추진하는 동시에 이슬람 금융과 토큰화를 결합한 새로운 시장을 육성하고 있다.
반면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필리핀은 이미 성장한 개인 중심 디지털 자산 시장을 제도권으로 편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연간 약 2000억 달러 규모의 온체인 거래가 이뤄지고 있으며, 필리핀에서는 약 350억 달러 규모의 해외 송금 시장에서 스테이블코인이 새로운 결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보고서는 토큰화 시장에서도 실질적인 사업 모델이 등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말레이시아는 국부펀드 카자나 나시오날과 함께 이슬람 채권인 수쿠크(Sukuk)의 토큰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금 실물자산을 토큰화해 담보대출과 유통을 결합하는 사례도 소개됐다.
한국 기업의 참여도 눈에 띈다. 교보증권은 SCBX 자회사 토큰엑스(Token X), 싱가포르 SBI디지털마켓과 협력해 와인 실물자산을 토큰화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한국과 동남아 금융 인프라를 연결하고 있다.
보고서는 토큰화 시장의 가장 큰 과제로 규제보다 상업은행의 참여 부족을 꼽았다. 상품이 규제 승인을 받더라도 계좌와 결제, 수탁 등 기존 금융 인프라를 담당하는 은행이 참여하지 않으면 실제 시장 출시가 어렵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토큰화 사업자는 초기 단계부터 금융기관과의 협력 구조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AI 에이전트가 결제하는 시대…”A2A 경제 대비해야”
보고서는 AI와 블록체인이 결합한 새로운 금융 환경에도 주목했다. AI 에이전트가 사람의 개입 없이 서로 서비스를 구매하고 비용을 정산하는 ‘에이전트 투 에이전트(A2A)’ 상거래가 확대되면 기존 카드 결제망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초소액·초고빈도 거래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이를 위해서는 수수료 부담을 최소화하고 예측 가능한 비용 구조를 갖춘 블록체인 기반 결제 인프라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실제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블록체인 플랫폼 아발란체는 국내 전자지급결제대행(PG) 기업과 함께 스테이블코인 정산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AI가 자연어 명령을 스마트컨트랙트로 변환해 가맹점 정산을 자동 수행하는 방식이다. 글로벌 결제기업 비자와 마스터카드 역시 디지털 금융 수용성이 높은 동남아를 차세대 결제 서비스의 테스트베드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보고서는 주목했다.
해시드는 앞으로 디지털 자산 산업의 경쟁력이 규제 자체보다 실제 생활 속 문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해결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 동남아시아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먼저 실험하고 검증하는 시장으로, 글로벌 디지털 금융 산업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핵심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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