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에 소름끼치는 겨울 끝자락, 첫 장면이 한여름이어서 좋았다. 공기가 나른하다. ‘미정도시락’ 아들내미 ‘용준(홍경 분)’이 허리를 길게 늘이고 테이블에 엎드려있다. 변변한 대학을 졸업하고도 아직 취직 못한 백수다. 엄마 ‘미정(정혜영 분)’은 허송세월하지 말고 도시락 배달 일을 도우라고 말하는 중이다. 철학과 출신인데 취업이 쉽겠냐고 볼멘소리 하는 아들. 철학과 출신인 난 미세한 심정지 신호를 느낀다. 철학과가 뭐 어때서? 허튼 핑계라네, 이 사람아.
등 떠밀려 나간 첫 배달처는 스포츠센터 수영장이다. 첫눈에 반할 여자가 거기 있을 줄 몰랐다. 배달 오길 잘했다. 청각장애인 수영선수 ‘가을(김민주 분)’과 언니 ‘여름(노윤서 분)’이 기록 체크를 하고 있다. 용준의 시선이 여름에게 단단히 그리고 아주 노골적으로 꽂힌다. 여름이 ‘알바’ 때문에 자리를 떠난 사이 동생 가을에게 ‘번따(연락처를 받는 행동)’를 시도하는 용준. 미리 배워둔 덕에 수어가 자연스럽다. 언니 번호냐 내 번호냐, 아니면 두 개 다 원하느냐고 장난스럽게 묻는 가을이. 싱그럽고 순수한 두 젊은이의 대화가 이 드라마의 분위기를 충분히 예고한다. 손짓과 표정만으로 통하는 모습이 자아내는 느낌은 특별하다. 순수하다. 짙고 깊다. 무의미하게 떠다니는 헛된 말들보다 두세 배 진실할 것 같다. 그래서 넋 놓고 빨려든다. 아마도 배우들 연기력 덕일 거라 여겨본다.
고장 난 여름의 스쿠터를 고쳐준 후로 용준과 여름은 친구가 된다. 수어로 소통해야 하지만 둘 사이엔 별다른 장애가 없다. 만남이 거듭되고 우정이 조금씩 쌓여간다. 용준에겐 여름이 처음부터 연인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 마음 들킬까 두려워 ‘밥 먹을까?’밖에 건넬 줄 모르던 말주변이 점점 늘어간다. 산책도 가고 클럽에도 가는 사이로 발전하던 중 어느 날 뜻밖의 사고가 일어난다. 국가대표 선발 전초전 대회에 나가려던 가을이 화재사고로 연기를 마시고 하필 이때 여름은 용준과의 데이트로 집을 비웠다. 여름은 심한 자책감에 빠진다. 동생의 올림픽 참가가 유일한 인생 목표였던 언니였다. 충격이 대단할 수밖에 없다.
사고 이후 컨디션 난조로 대회 참가가 불투명해진 가을. 그 모든 게 자신의 책임이라 여기는 여름. 자매는 쉴 새 없었던 눈맞춤과 손 대화를 멈춘다. 상처와 상실이 한꺼번에 닥친 탓이다. 여름은 용준과도 연락을 끊기로 한다. 인생 목표로 두었던 동생의 꿈이 좌절됐다. 동생을 잘 돌보지 못한 탓이다, 그러니 남자친구는 제대로 챙길 수 있겠냐는 걱정과 두려움이 마음을 붙잡고 놔주질 않는 듯하다. 헤어질 것을 미리 염려하는 사랑,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옛 순애보 비슷하다.
여름과 가을의 부모는 모두 농인이다. 장애인 가정이니 가족은 평생 서로 의지하고 돌봐야 할 대상이라 여기고 자랐다. 특히 동생 가을을 돌보는 일은 자신의 책무이자 목표이자 꿈이었던 모양. 여름에겐 내내 그런 아름다운 슬픔이 있었다. 여름은 고향 부모님을 찾아갔다가 모처럼 엄마와 마주 앉는다. 엄마의 진솔한 다독임에 마음이 녹아내린다. 이제 그만 돌봄을 내려놓고 자신의 인생을 살라는 따뜻한 충고다. 그 순간이 애달프긴 여름이나 관객인 당신이나 매한가지다. 누구나 한 번은 눈물 훔치고 지나갈 장면이다.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여전히 갈 길 잃은 듯 멍한 여름이 텅 빈 수영장 물에 온몸을 적시고, 그때 용준이 나타난다. 연락 끊고 제 속 타게 한 여름을 나무라야 마땅한 것을, 용준은 오히려 사과하고 위로한다. 등 돌리고 있는 여름에게 간곡하게 전한 그의 고백. 수어가 아닌 음성으로 독백하듯 전한 청년의 사랑 이야기는 듣는 내내 아름답다. 갈등과 고뇌가 대단한 듯했지만 둘은 이제 깨닫는다. 먼저 ‘내가 있어야 상대를 돌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헤어짐을 염려하는 것 자체가 사랑이므로 헤어질 수 없다는 사실. 그냥 내 식대로 해석이다.
어쨌거나 둘은 다시 사랑하기로 한다. 용준의 권유로 ‘미정도시락’에서 ‘알바’를 하기로 한 여름이 면접(?) 보러 간 날, 용준 부모의 친절과 익살에 환하게 웃는 모습은 행복의 절정이다. 선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이 여름 빛깔과 어우러져 청량하고 짱짱하다. 게다가 불쑥 끼어든 반전 때문에 입이 쩍 벌어지는데, 제법 큰 스포일러라 차마 그건…. 기막힌 반전을 어쩜 그렇게 무덤덤하게 흘리는지, 허를 찔렸다.
‘청설’(2024)은 2010년 개봉한 대만 영화 ‘청설(Hear Me)’을 리메이크한 영화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선공개된 후 제법 관람객을 끌었다. 대만에 역수출도 됐고 대본집도 꽤 인기를 끌었다. 용준과 여름, 가을 그리고 ‘미정도시락’ 주인 미정과 ‘인철(현봉식 분)’, 친구 ‘재진(정용주 분)’은 모두 다 우리 이웃이다. 하지만 어디 이들만큼 선량하기가 쉬우랴. 이 사람들의 마음과 손짓과 말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내 가슴이 몽글몽글하다. 그래서 그 대본집을 나도 구하고 싶다. 물론 영화에선 입말이 아닌 수어가 대부분이다.
”세상 참 단단한 것 같아. 소리 하나 없을 뿐인데 완전 다른 세상이야. 들어갈 수도 없고 나갈 수도 없고…. 아마 영원히 변하지 않겠지.“(풀에서 장애인 선수 빼달라는 비장애인 학부모의 폭력적 항의를 들은 여름이 용준에게)
”멀쩡한 사람도 말 안 통하는데 사람만 좋으면 되지 뭘.“(아들 여친이 청각장애인이라는 소릴 듣자마자 인철이 아내 미정에게)
너무 재미있어서 극한 감동을 느낀 대사도 있다.
”밥 많이 똥 엄청.“(인철이 면접 온 여름에게 보여준 스케치북 문구. 아들 용준을 여친에게 소개하는 아빠의 필살기?)
철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다. 눈물 나게 웃겼던 걸 어떡하나.
글 이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