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도원암
문의 (055)883-1901
실패 없는 봄 여행지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경남 하동군“이라 답한다. 뻔한 대답이라 해도 할 수 없다. 이즈음 하동에 대적할 만한 여행지를 찾기가 힘든 건 사실이니. 하동은 지금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봄꽃 잔치가 펼쳐지고 지리산과 섬진강이 차려내는 봄의 진미가 상에 오른다. 서둘러 만개한 십리벚꽃은 아쉽게도 벌써 ‘엔딩’을 고했지만 하동 쌍계사 여행은 연둣빛 새순이 돋는 지금부터가 제철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격년제로 선정하는 ‘한국관광 100선’에 처음 이름 올린 하동 지리산 쌍계사로 봄 마실을 떠났다.
‘동국화개동 호중별유천(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동쪽 나라 화개동은 호리병 속 별천지라네)’. 통일신라 때 학자이자 명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의 시 ‘호중별천(壺中別天)’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쌍계사는 섬진강과 지리산 주능선 사이의 신령스러운 골짜기를 이르는 화개동, 화개동천의 중심에 있다. 화개동은 화개동천(花開洞天)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꽃이 피고 신선이 사는, 하늘과 잇닿은 곳’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꽃 화(花), 열릴 개(開)라는 이름만으로도 이미 봄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동네다.
화개동천의 중심 ‘쌍계사’
화개동, 화개동천을 별천지라 노래한 이는 비단 최치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시인 묵객이 화개동천에 마음을 심어두고 갔다. 고려시대 학자이자 문인이었던 이인로도 ‘파한집’에서 화개동천을 두고 ‘지나는 곳마다 선경이 아닌 곳이 없었다. (중략) 대나무 울타리에 때를 입힌 집들이 복숭아꽃, 살구꽃에 어리어 정말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듯하다’고 기록해 두었다.
지금의 화개동은 섬진강변 ‘화개장터’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쌍계사 가는 길을 따라 이어진다. 벚나무가 빽빽하게 터널을 이룬 완만한 ‘S’자 곡선의 왕복 2차로에 들어서면 ‘별천지’에 ‘체크인’한다. 화개천 물길을 곁에 두고 왼쪽 창 너머로는 키 작은 집들과 솜뭉치 같은 꽃 군락이 이어지고 오른쪽 창 너머로는 초록의 야생 차밭이 펼쳐지는 풍경은 이 봄에 더욱 몽환적이다. 실컷 눈 호강 하고 나면 어느새 쌍계사 초입에 이른다. 천년 고찰이라는 역사에 비해 소박한 정취를 풍기는 일주문엔 ‘삼신산 쌍계사(三神山 雙磎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삼신산’은 금강산, 한라산, 지리산을 일컫는다.
하동이 차밭이 되기까지
쌍계사 창건 시기는 신라 성덕왕 22년(723년)쯤으로 보고 있다. 당시 고승 삼법화상이 당나라에서 유학 후 육조 혜능(六祖慧能)대사의 정상(두상)을 모셔올 때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눈 속에 칡꽃이 핀 곳)에 봉안하라’는 뜻을 받들게 됐다. 지리산쯤에서 호랑이가 마중을 나와 따라가니 눈 덮인 곳에 칡꽃이 만발해 있어 그곳에 봉안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후 신라 문성왕 때 진감혜소 선사가 봉안한 자리에 영당을 짓고 이후 절을 확장해 옥천사(玉泉寺)라 불렀다. 후대에 헌강왕이 ‘두 시내가 만나 흐른다’는 뜻의 ‘쌍계사’라는 이름을 하사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건 설화와 함께 옥천사 창건 전인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 사신이었던 대렴공이 귀국하면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화개 일대에 심었다는 내력이 ‘하동 쌍계사 차나무 시배지’에 남아 있다.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번 중창을 거쳐온 쌍계사는 임진왜란 때 크게 소실되어 인조 때 벽암스님이 중건한 이래 다시 중창과 복원, 중수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교 유산의 보고(寶庫)
지리산에 안긴 듯 자리한 쌍계사는 크게 ‘금당’, ‘대웅전’, ‘문화예술관’ 영역으로 나뉜다. 금당 영역과 대웅전 영역은 서로 교차하는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덕분에 탐방 동선도 복잡하지 않고 짜임새 있다.
사찰의 중심 공간인 대웅전 영역은 ‘쌍계석문’과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 천왕문, 팔영루를 잇는다. 일주문을 넘어서면서부터 들떠있던 마음과 발걸음이 차분해진다. 대나무와 삼나무, 계곡이 에워싼 고요한 숲길을 따라 걸어가면 청아한 바람 소리, 물소리가 동행한다. 대나무가 장막을 두른 듯 펼쳐진 금강문, 천왕문을 차례로 통과하면 정면에 ‘팔각구층석탑’이 마중 나온다. 석탑 자체는 1990년대 세워진 것이어서 역사가 오래되진 않았으나 부처님 진신사리 등을 봉안한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창건 설화 속 장소부터 가보려면 옥천교부터 건너볼 일이다. 쌍계사의 역사가 시작된 금당과 팔상전이 기다린다. 금당 자리는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이자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을 봉안한 곳으로 쌍계사의 개산(開山·처음으로 산문을 연 것)과 관계가 있는 유적이다. 전각 앞쪽엔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걸려 있고 전각 내에 ‘육조정상탑’이 자리한다. 이 탑을 품고 있어 ‘육조정상탑전’이라고도 한다. 금당은 스님들이 여름과 겨울 안거(수도) 기간에 공부하는 곳으로 안거 기간 해제 때만 개방한다.
최치원의 흔적을 찾아
쌍계사의 여러 문화유산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국보인 대웅전 앞 ‘진감선사탑비’다. 통일신라 말 승려이자 범패(불교 음악)를 도입해 전파한 진감선사를 기리는 탑비로 진성여왕 때 세워졌다. 최치원이 직접 글을 짓고 쓴 것으로 유명하다. 몸돌에 일부 손상이 있긴 하나 해서체로 정갈하게 비문을 새긴 탑비는 천년의 시간 속에서도 거북받침돌, 머릿돌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다. 한쪽에 고려시대에 만든 마애불도 있으니 눈여겨 보자.
탑비를 중심으로 최치원의 이야기는 쌍계사 안팎에 깨알같이 숨어 있다. 자연스레 쌍계사 초입 ‘구길’ 쪽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는 ‘쌍계석문(雙磎石門)’으로 발길을 이어간다. 거대한 두 개의 바위엔 쌍계, 석문 글자가 선명하다. 각자가 새겨진 바위 문은 새 길이 나기 전까지 오래도록 지리산 쌍계사의 산문 역할을 했던 곳이다. 최치원이 쇠지팡이로 쓴 글이라 하여 철장서(鐵杖書)라고도 불린다.
지리산 산신이 됐다는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전설의 ‘환학대’ 바위도 가까이 있지만 쌍계석문 부근에 음식점이 포진해 있어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다. 4월의 차밭은 또 어찌 그리 좋은지, 쌍계사를 벗어나면 또다시 ‘세속의 번뇌’가 시작된다.
박근희 객원기자
가까이 있는 ‘2025~2026 한국관광 100선’
화개장터
김동리의 소설 ‘역마’에서 ‘언제 보나 길 멀미가 나지 않는다’고 했던 화개길을 따라 5㎞, 차로 10분 거리에 쌍계사와 함께 ‘2025~2026 한국관광 100선’에 이름 올린 ‘화개장터’가 있다. 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가수 조영남이 불러 더욱 유명해진 ‘화개장터’ 노래가 먼저 마중 나온다.
‘장돌뱅이(보부상)’의 삶을 다룬 소설 ‘역마’ 속 옥화주막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화개장터는 영호남의 접경에 자리해 조선 중기부터 광복 전까지 우리나라 5대 장터 중 하나로 번성했던 곳이다. 지리산의 산채와 목기류는 물론이고 남해안의 수산물과 소금, 호남평야의 곡물 등이 한자리에 모이는 집산지였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교통과 유통의 발달로 점차 쇠락의 길을 걷다 ‘관광 시장’으로 변모했다. 옛날 시골장터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장터에는 국밥집, 도토리묵, 재첩국집, 주막 등 식당과 함께 특산품 판매장이 들어서 있어 오가는 길에 들러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