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의 외침과 함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객석에서는 탄성과 환호가 터진다. 얼굴이 아닌 목소리만으로 승부하는 무대, MBC 예능 프로그램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이하 ‘복면가왕’)의 클라이맥스다.
2015년 4월 첫 방송 이후 2026년 1월까지 약 2500명의 ‘복면가수’가 무대에 올랐다. ‘복면가왕’은 10년 넘게 이어진 장수 예능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고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약 60개국에 포맷이 수출됐다. 특히 미국판 ‘더 마스크드 싱어(The Masked Singer)’는 큰 인기를 끌며 최근 시즌 14까지 방영됐다.
성과는 수상으로도 이어졌다. 2016년 제49회 휴스턴 국제영화제 ‘TV부문 동상’, 영국 K7 미디어 선정 ‘2019년 올해의 포맷상’, 영국에서 열린 2020 국제 포맷 시상식에서 한국 최초 ‘베스트 리터닝 포맷상’ 등을 수상했다.
프로그램을 기획한 박원우 작가는 2022년 세계 최대 방송영상 콘텐츠 마켓 ‘MIPTV’에서 아시아 최초로 ‘국제 포맷 어워즈(International Format Awards) 대상’을 받았다. 리얼리티쇼, 게임쇼, 다큐멘터리 등 여러 장르를 통틀어 한 해 한 명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그는 첫 방영부터 10년 동안 ‘복면가왕’을 맡았다.
박 작가는 ‘복면가왕’이 탄생하기까지 오랜 고민과 시행착오가 있었다고 떠올렸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쏟아지던 당시 그는 노래 실력보다 외모가 더 주목받는 현실에 아쉬움을 느꼈다. 더 공정하게 평가받는 환경을 만들 수 없을까 고민한 끝에 ‘얼굴을 가린 무대’를 구상했다. 그는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하는 반응이 나와야 진짜 오디션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아이디어는 셀럽이 참여하는 음악쇼 요소를 더해가며 지금의 포맷으로 구체화됐다.
하지만 기획은 시작부터 벽에 부딪혔다. 편견을 깨보자는 취지였지만 돌아온 반응은 오히려 더 큰 편견이었다. ”이게 되겠느냐“, ”안 된다“는 회의적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가수를 가면 뒤에 숨긴다는 발상 자체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출연자 섭외가 가능하겠느냐는 우려도 컸다.
”한 국장님은 ‘다 좋은데 가면만 빼는 건 어떻겠느냐’고 하더래요.(웃음) 몇 주 동안 회신을 기다리다가 전화를 걸어 안 하면 다른 방송사에 제안하겠다고 했더니 다른 방송사에서 잘됐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3년 가까이 표류하던 기획안은 2015년 설 연휴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제작되며 비로소 빛을 봤다.
오리지널 기획자 IP 보호받는 구조 필요
‘복면가왕’의 완성도는 치밀하게 설계된 ‘보안’이다. 제작진은 출연진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공간을 분리했다. 대기실과 화장실 위치까지 고려해 이동경로를 나누고 통로에 가벽을 세워 우연히 마주칠 가능성도 차단했다. 출연자는 방송국에 들어올 때부터 가면을 쓴 채 연습과 리허설을 진행했다. 스태프 역시 복면가수의 정체를 알 수 없도록 하는 원칙은 방영 10년 동안 바뀐 적이 없다.
첫 포맷 수출은 중국이었다. 박 작가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중국 시장 진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시 K-콘텐츠 모방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전환점은 미국이었다. 그는 ”중국 진출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흐름이었지만 미국에서 제안이 왔을 땐 정말 놀랐다“고 했다. 미국 프로듀서가 포맷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방송사 설득에 나섰고 결국 폭스(FOX)를 통해 방송이 성사됐다. 미국판은 2019년 첫 방송에서 900만 명의 시청자를 끌어모았다. 미국 예능 프로그램 첫 방송 시청률로는 7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를 계기로 ‘복면가왕’은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포맷으로 자리 잡았다.
박 작가는 K-예능의 글로벌 경쟁력을 ‘구조를 만드는 힘’에서 찾았다.
”한국은 ‘왜 하는가’라는 명분부터 시작해 단계와 서사를 촘촘히 설계합니다. ‘복면가왕’만 봐도 1라운드부터 3라운드, 가왕전까지 이어지는 다층 구조로 돼있습니다. 반면 미국은 회당 한 명씩 탈락시키는 단순한 구조입니다. 방송 시간도 한국은 약 2시간, 미국은 50분이 채 되지 않았어요. 이처럼 규칙과 서사를 설계하는 힘이 글로벌 시장에도 전파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다만 그는 K-콘텐츠의 성공이 곧 산업의 성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짚었다. 창작자의 권리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컸다. 원조 포맷이 해외에서 재생산되더라도 창작자가 IP(지식재산권)를 확보하지 못하면 지속적인 수익을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창작자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고민도 오래해왔다. 해외에서는 작가가 ‘쇼러너’나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로 인정받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지위가 모호한 경계에 머물러 있다. 이 문제의식에서 그는 크리에이티브 콘텐츠 제작사 ‘디턴(di turn)’을 설립했다. ‘IP를 돌려주다’라는 의미를 담았다. 프리랜서 중심의 불안정한 노동 환경에 놓인 작가들이 안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또한 ”K-컬처에 대한 투자 논의가 확대되고 있지만 정작 현장 창작자에게 성과가 돌아가는 구조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는 ”현장에서 만들어진 아이디어가 일회성으로 소비되지 않고 IP로 축적돼 해외로 확장되고 수익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시장 넘어 해외 포맷 개발까지
박 작가는 1997년 SBS ‘한선교의 좋은 아침’으로 방송작가 활동을 시작해 MBC ‘특종 연예시티’로 데뷔했다. 이후 KBS ‘스펀지’, MBC ‘느낌표-위대한 유산 74434’, KBS ‘배틀트립’, MBN ‘로또싱어’, Mnet ‘마이 보이프렌드 이즈 베러’ 등을 집필했다. 그에게 기획은 ‘순간의 번뜩임’이 아니다. 휴대전화에는 떠오르는 아이디어와 장면을 그때그때 기록한 메모가 빼곡하다. 그는 한 가지 생각을 오래 붙잡고 다듬어가는 과정 속에서 기획이 형태를 갖추게 된다고 말한다.
음악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을 꾸준히 기획해온 것도 축적의 결과다. 대학 시절 노래 동아리에서 활동할 만큼 음악을 좋아했고 자연스럽게 음악 예능이 기획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해외 제작자와 쿠킹쇼, 음악 리얼리티쇼를 준비하고 있다. 국내 경쟁을 넘어 글로벌 기준에서도 통할 수 있는 포맷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가 기획한 OTT 콘텐츠 ‘넥스트 레전드’도 그 연장선에 있다. 차세대 축구 유망주들이 경쟁을 통해 해외 진출 기회를 얻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실제로 출연자(김은성)가 영국 잉글랜드의 명문 구단 ‘선덜랜드’ 입단 테스트 제안을 받으며 가능성을 입증했다.
”요즘은 볼 게 너무 많아서 오히려 ‘볼 게 없다’고 느끼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과거에는 방송사가 몇 개 없어서 특정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관심이 모였어요. 지금은 손안의 휴대전화로 언제든 콘텐츠를 접할 수 있죠. 재미있는 콘텐츠는 많은데 선택지가 너무 많다 보니 무엇을 봐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거죠.“
그는 기획 단계부터 해외 제작자와의 협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기획안을 해외 프로듀서에게 전달하면 구체적인 피드백이 돌아온다. 단순한 자문을 넘어 공동 제작 단계로 확장됐다. 아이디어를 해외시장에 맞게 발전시키고 실제 론칭까지 함께 추진하는 방식이다.
그는 ”글로벌 시장에서 무엇이 통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사무실 한쪽 벽면에는 아이디어를 적은 메모가 빼곡했다. 생각을 붙들고, 기록하고, 다시 다듬으면서 밀도를 높여온 시간의 흔적이다. 그렇게 쌓인 메모들은 다음 기획의 출발점이 된다. 이근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