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발 전화(戰火)가 한반도 경제의 지형을 조금씩 바꿔놓고 있다. 충격은 예고 없이 상륙하고 방어는 타이밍을 잃는 순간 무용지물이 된다. 두바이유 가격은 불과 3주 만에 배럴당 68달러에서 138달러로 수직 상승했다. 이것은 그저 숫자가 아니다. 주유소 기름값, 배달비, 식료품 유통 원가, 겨울 난방비, 그리고 마진이 없는 영세 자영업자의 생존선이다. 유가는 경제의 혈압이다. 한번 급등하면 몸 전체가 달라진다. 그리고 지금, 그 혈압이 빠르게 오르고 있다.
정부가 26조 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한 것은 충격이 이미 관망의 영역을 넘어섰다는 판단에서다. ‘조금 더 지켜보자’는 접근은 지금 국면에서 신중함이 아니라 태만이다. 화염이 번지는 순간 진화 장비를 꺼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꼴이다. 정책은 피해가 가시화한 이후가 아니라 충격이 구조로 굳기 전에 작동해야 의미가 있다. 선제성이야말로 이번 추경의 본질이다.
이번 추경의 구조를 뜯어보면 성격이 뚜렷하다. 고유가 부담 완화에 10조 1000억 원, 민생 안정에 2조 8000억 원, 산업·공급망 방어에 2조 6000억 원, 지방재정 보강에 9조 7000억 원이 편성됐다. 규모는 크지만 성격은 확장재정이 아니다. 전쟁이 만들어낸 비용 충격의 파열을 막는 방어막이다. 목적 자체가 성장률 제고가 아니라 충격의 파국적 확산을 막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이 예산이 없으면 무너지는 곳이 생긴다는 경고가 설계 안에 담겨있다.
시급성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두바이유는 2월 말 배럴당 68달러에서 3월 중순 138달러로 3주 만에 두 배를 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한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을 2.1%에서 1.7%로 0.4%p 하향 조정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구조적 취약성 때문이다. 소상공인 체감 경기는 내리막을 걷고 있고 청년고용률은 전년 동기 대비 22개월 연속 뒷걸음질치고 있다. 해운·물류비 부담도 확대되고 있다. 이 수치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충격은 이미 안쪽 깊숙한 곳에서부터 스며들고 있다.
충격의 파장은 빠르고 깊다
유가 충격은 특성상 연쇄적으로 번진다. 에너지 비용이 오르면 연쇄적으로 운임이 뛰고, 소비자 물가가 올라가고, 가계 구매력이 줄고, 내수가 꺼지고, 고용이 흔들린다. 생산은 줄고 물가는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고리는 일단 맞물리기 시작하면 끊어내기 어렵다. 특히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절대적인 한국 경제에서는 연쇄의 속도가 빠르고 충격의 깊이도 상당하다. 충격이 소비심리와 산업 전반으로 번진 뒤에는 같은 재정을 투입해도 효과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선제 개입이 사후 수습보다 언제나 비용이 낮은 이유다.
가장 주목할 항목은 4조 8000억 원 규모의 고유가 피해지원금이다. 소득하위 70% 국민에 1인당 10만 원에서 최대 60만 원을 차등 지급하되 지역과 계층에 따라 두께를 달리했다. 수도권보다 비수도권에, 비수도권보다 인구감소지역에 더 두텁게 설계됐다. 기초생활수급자·차상위계층·한부모가정은 우선지급 대상이고 이후 건강보험료 기준으로 소득하위 70%까지 2차 지급하는 구조도 갖췄다. 보편지원이냐 선별지원이냐는 이분법을 넘어 두 방식을 결합해 실제 고통이 큰 곳에 재정이 집중되도록 한 것이다. 형식적 보편성보다 실질적 집중성을 위한 선택이다.
물가 우려를 앞세우는 시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추경이 물가를 자극하는 구조인지는 지원 방식을 세밀하게 봐야 판단이 가능하다. 소득 전 계층에 현금을 뿌리는 방식과, 에너지 비용 상승으로 생계가 흔들리는 하위 계층의 부담을 완화하는 방식은 물가 파급력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번 추경의 핵심 지출인 석유 최고가격제, 대중교통 환급 확대, 에너지바우처, 면세유·선박용 경유·비료·사료 지원 등은 새로운 소비 수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치솟은 비용을 흡수하는 완충 장치다. 전쟁이 만들어낸 물가 충격을 억제하는 예산이 오히려 물가를 끌어올린다는 비판은 인과관계를 뒤집은 진단이다. 한국은행 역시 현재 물가가 대체로 목표 수준 근방에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추경의 물가 영향은 지원 대상과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는 취지로 설명해왔다.
관건은 ‘얼마를 쓰느냐’가 아니라 ‘언제 쓰느냐’다
재원 조달 방식도 이번 추경의 신뢰도를 뒷받침한다. 정부는 적자국채를 추가로 발행하는 대신 초과세수 25조 2000억 원과 기금 여유 재원 1조 원으로 재원을 마련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기존 국채 1조 원을 오히려 상환하겠다고 밝혔다. 본예산 대비 국가채무와 관리재정수지 지표 모두 소폭 개선되는 구조다. 위기 대응과 재정 기율이 같은 방향을 향하도록 설계됐다는 뜻이다. 긴급 처방이 장기 신뢰를 갉아먹는 구조가 아니라 대응과 건전성을 동시에 묶은 설계다. 지금 돈을 풀면서도 빚은 줄인다는 이 역설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재원 구조를 치밀하게 짰다는 방증이다.
이번 추경을 두고 ‘써도 되느냐’를 따지는 것은 질문이 틀렸다. ‘지금 쓰지 않으면 그 피해는 어디로 가느냐’가 맞는 질문이다. 가뭄이 들면 웅덩이의 가장자리부터 마른다. 취약계층, 소상공인, 청년이 바로 그 가장자리다. 이들에게 ‘좀 더 지켜보자’는 말은 대답이 아니다. 충격이 일상 깊숙이 자리 잡기 전에 막아야 한다. 이번 추경의 의미는 얼마를 쓰느냐가 아니라 언제 쓰느냐에 있다.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