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사운드트랙 어워즈 ‘젊은 작곡가상’ 김봉섭
2025년 10월 벨기에 겐트. 영화음악계의 미래를 가늠하는 무대에서 한국인 이름이 호명됐다. 국제 영화음악 시상식 ‘2025 월드 사운드트랙 어워즈(WSA)’에서 젊은 작곡가상 수상자가 발표된 순간, 스물여덟 살 김봉섭 작곡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영화음악계에서 WSA는 미국 아카데미(Oscars), 골든글로브(Golden Globes), 영국 아카데미(BAFTA)와 함께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무대다. 그중에서도 ‘젊은 작곡가상’은 차세대 주자를 가려내는 등용문으로 꼽힌다. 그가 한국인 최초로 그 문턱을 넘은 것이다.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음악을 담당한 정재일 작곡가도 2022 월드 사운드트랙 어워즈 ‘TV 작곡가상(Television Composer of the Year)’ 후보에 오른 바 있다. 그러나 수상까지 이어진 것은 김봉섭이 처음이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어린 작곡가에 불과한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수상작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엘리펀트 맨(The Elephant Man)’의 주인공 조셉 캐리 메릭이 군중에 쫓기다 기차역에 몰리는 장면을 3분가량의 음악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클라리넷의 고음과 하모닉스·트레몰로 주법을 통해 비극적 감정의 결을 따라가면서 긴장을 표현해냈다. 심사위원단은 ”전통적인 관현악법과 현대음악적 색채를 균형 있게 조화하면서도 주인공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음악적 구성과 오케스트레이션이 인상적“이라고 평했다.
3월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OST ‘Golden’을 만든 작곡가 이재(EJAE)가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 창작자가 영화음악의 중심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0년 뒤에는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영화음악 작곡가가 되겠다“는 김봉섭을 만나 영화음악의 세계에 대해 들었다.
작곡을 시작한 계기가 트럼펫이라고.
초등학교 때 친구 따라 호기심에 관악부를 갔다가 트럼펫에 매료돼 자연스럽게 활동을 시작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직접 멜로디를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한동안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 음악을 내려놓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왔다. 작곡으로 대학에 입학하고 군에 입대해 군악대에 복무하면서 진지하게 작곡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작곡 공부를 위해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현대음악을 중심으로 음악 작업 방향을 구체화하고 있다.
한국인 최초 월드 사운드트랙 어워즈 수상자로 호명됐을 때 심정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도 트로피를 보면 낯설다. 사실 10년 가까이 작곡을 공부하면서 뚜렷한 성과가 없어 스스로를 의심한 적도 많았다. 무엇보다 나를 믿어주신 부모님께 처음으로 성과를 보여드린 것 같아 기뻤다. 계속 성장해 좋은 음악을 선보일 수 있는 작곡가가 되겠다.
수상 당시 현장 반응은 어땠나.
시상식 이후 열린 리셉션에서 많은 관계자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한 관객은 내 곡을 듣자마자 수상을 확신했다고 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지휘를 맡은 디르크 브로세(Dirk Brossé)가 건넨 조언이었다. 그는 내게 수상 이후에도 10년 동안은 눈에 띄는 변화가 없을 수 있지만 스스로를 믿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라고 말했다. 위로와 동기부여를 함께 얻는 기분이었다.
수상작의 작곡 과정이 궁금하다.
대회 과제로 주어진 ‘엘리펀트 맨’의 장면을 시간대별로 분류하고 그 속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의 흐름을 세밀하게 구분했다. 실화 기반의 영화인 만큼 시대적 배경도 함께 조사했다. 이후 전체적인 음악 구조를 설계하고 장면에 맞게 세부적인 음악적 요소를 채워넣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에서는 클라리넷의 음을 미묘하게 상승시켜 긴장감을 만들고 하모닉스(harmonics·현의 특정 지점을 가볍게 터치해 맑고 공기처럼 떠있는 고음을 내는 기법)와 트레몰로(tremolo·활을 매우 빠르게 앞뒤로 움직여 음이 떨리듯 지속되는 효과)로 불안한 공기를 표현했다.
작업에서 중요하게 보는 기준은 뭔가.
소리가 음악 안에 녹아들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려 한다. 튀는 소리가 곡의 매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소리들이 맺는 균형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작곡의 기본적인 원칙 중 하나다. 특히 영화음악의 경우 관객이 장면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음악의 매력은 무엇인가.
영화에는 다양한 장면과 감정의 흐름이 담겨있어 이를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요소가 무궁무진하다. 긴 호흡으로 작품 전체의 흐름을 음악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점이 영화음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음악만 듣더라도 영화의 해당 장면이 떠오르는 경험, 그것이 영화음악의 힘이다. 대중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파동될 수 있는 영화음악을 만들고 싶다.
한국 영화음악에 대한 생각은.
이제 ‘보편적인 한국성’을 반드시 드러내야 할 대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K-콘텐츠는 이미 전 세계가 인정하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억지로 강조하기보다 작곡가 개인의 감각과 경험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제는 한국적이지 않을 때 가장 한국적인 음악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작곡 방향은.
지금 단계에서 방향을 단정하긴 이르다. 아직은 음악적 경험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양한 음악을 듣고 공부하며 음악 언어로 체화하는 과정에 있다. 인상적인 곡이 있으면 구조와 소리를 해부하듯 들여다본다. 표현하고 싶은 소리가 떠오르면 그 소리를 중심으로 다른 요소를 정리하기도 한다. 최대한 많은 소리를 이해한 뒤 나만의 세계로 확장하고 싶다.
영상음악 프로젝트도 준비 중이라고.
1990년대 영화를 중심으로 기존 장면에 새로운 음악을 입히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 젊은 작곡가들이 각자의 해석을 더해 라이브 연주로 구현하는 방식이다. 관객에게는 익숙한 영화의 감성을 새로운 감각으로 경험하게 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음악을 꼽는다면.
영화 ‘가위손(Edward Scissorhands)’의 OST인 ‘Ice Dance’라는 곡이다. 대니 엘프만(Danny Elfman)이 작곡한 이 곡은 작품 특유의 서정성과 몽환적인 분위기를 섬세하게 담아내 어린 시절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기억까지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영화를 보면 음악이, 음악을 들으면 해당 장면이 바로 연상될 만큼 영상과 음악이 긴밀하게 결합돼 있다.
우리나라 영화음악의 특징이 있나.
하나의 특징으로 단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음악 자체가 대사나 연출을 보완하고 때로는 영화의 밀도를 높이는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 ‘괴물’, ‘신세계’에 쓰인 음악도 그렇다. 인물의 감정선과 서사의 흐름을 즉각적으로 환기해 영화가 의도하는 극중 분위기를 순식간에 조성하기도 한다.
작곡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끊임없이 곡을 쓰고, 내 곡을 들려줄 수 있는 무대라면 어디든 도전해야 한다. 나 역시 2025년에만 여섯 번 이상 공모전에 지원했다. 도전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완벽한 준비를 기다리기보다 부딪치는 과정에서 더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백재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