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봄 한국의 한 정치평론가가 정치적 갈등 지형을 설명하기 위해 ABC로 나뉜 벤다이어그램을 그렸다. 겹쳐진 두 개의 원은 이념형(A)과 이익형(B), 그리고 그 교집합(C)으로 구획됐다. 이념에 충실한 부류를 ‘A’로, 이익에 충실한 부류를 ‘B’로 규정하는 그의 시도는 찬반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회학자의 눈에 이 사건은 서투른 분석 프레임을 넘어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철학자)가 경고한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인식론적 사례다. 추상적이고 자의적으로 만든 틀에 살아 숨 쉬는 현실의 사실을 억지로 욱여넣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과학적 진실을 가리는 오류를 범한다.
성스러운 경계와 인지적 지름길
하지만 이런 인지적 오류에 대한 감수성은 복잡한 논증과 씨름하는 직업 학자에게나 익숙할 뿐 현실을 살아가는 대중이 실감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세상을 범주화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에 따르면 선을 긋고 범주화하는 행위는 무의미하고 끝없는 혼돈(세속) 속에서 의미 있는 질서(성스러움)를 창조하려는 문명적 생존 본능이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의 통찰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인간은 평균적으로 인지적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피곤한 확률 계산 대신 즉각적이고 단편적인 범주를 선호한다. 더 나아가 사회학자 해리슨 화이트가 지적했듯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뚜렷한 정체성이라는 범주는 사회를 굴러가게 만드는 통화(social currency) 같은 것이다. 대중은 피곤한 다차원적 현실 이해보다는 단순한 ABC를 원한다.
결정론의 쇠퇴와 AI가 바라보는 고차원의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 이언 해킹이 통찰했듯 확률론과 통계학의 발전과 함께 범주적 결정론은 역사적으로 서서히 약화돼 왔다. 세상은 명확히 단절된 교차표(contingency table)가 아니라 수많은 특성이 스펙트럼처럼 펼쳐지는 ‘확률 분포(probability distribution)’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적어도 지난 세기 내내 시장, 정부, 국제정치 같은 거대 시스템은 결정론과 이를 뒷받침하는 명쾌한 범주들을 퇴장시켜왔다.
그리고 이 추세는 알고리즘과 인공지능(AI)에 이르러 절정을 향하고 있다. 대중이 여전히 ABC라는 범주로 서로를 구분하는 사이 데이터의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수백만 명의 일상적 행동은 수조 개의 범주가 중첩된 고차원 안에서 기존의 언어로는 해석조차 불가능한 클러스터를 형성한다. 알고리즘은 이미 고차원의 사회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으며 AI는 우리가 맹신하는 ABC 범주 내부에서조차 미세한 다양성과 이질성을 포착해낸다. AI의 눈에 비친 인간은 A나 B가 아니라 수천 개의 변수가 빚어내는 연속적인 ‘확률적 유령(Probabilistic Ghost)’에 가깝다.
ABC 도식을 넘어 확률적 유령의 임무
세계에 대한 더 정확한 판단이 ABC와 같은 단절된 상자가 아니라 일일이 이름 붙이기조차 어려운 무수한 조합의 ‘분포’임을 인정하는 순간 과학자는 비로소 범주의 상자를 벗어난 ‘확률적 유령’이 된다. 이 유령의 시선에서 보면 평론가가 그어놓은 명징한 범주는 그저 뻔한 평범함이 뭉쳐있는 둔탁한 평균값에 불과하다. 반대로 비범하고 다채로운 것은 평균에서 멀리 떨어져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소수의 변종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확률적 통찰은 우릴 꿰뚫어보려는 AI의 집요한 데이터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철학적 밑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이 열광하는 ABC를 엘리트주의적 시각으로 마냥 조롱할 수만은 없다. 그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이 여전히 세상을 해석하고 무리 지으며 연대하는 실제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연구자로서 나의 임무는 이 거대한 인식론적 간극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대중이 ABC를 필요로 하는 인지적 필연성을 긍정하면서도 그 앙상한 뼈대 이면에 자리한 풍요롭고 연속적인 분포야말로 진실된 현실임을 끊임없이 환기해야 한다.
AI 시대 인간이란 참으로 앙상한 ‘범주적 기계(categorical machines)’ 속을 살아가야만 하는 복잡한 확률적 유령들이다. ABC 도식은 인간을 참으로 인간답게 만드는 미묘한 뉘앙스를 희생해가면서 거대한 정치적 기계를 자신에게 조금 더 유리하게 작동시키려던 애처로운 시도였을 뿐이다.
이원재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