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1947m)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숫자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화산이 빚어낸 섬, 제주도의 중심이자 국립공원·천연기념물, 그리고 유네스코가 인정한 자연유산을 모두 품은 세계적인 산이다. 2002년 생물권보전지역, 2007년 세계자연유산, 2010년 세계지질공원으로 잇따라 지정되며 ‘유네스코 3관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정상의 화산 분화구 백록담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마음의 성지’다. 설악산이 화려한 암릉미로 등산객을 압도하고 지리산이 어머니 품처럼 넉넉하다면, 한라산은 구름 위에 떠있는 ‘신의 정원’ 같은 신비를 품고 있다.
한라산 높이는 지난 100여 년간 1950m로 알려져있었다. 그러나 2008년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정밀 측정한 결과 1947m로 수정됐다. 측량 기술의 발전으로 공식 높이는 1947m로 확인됐지만 여전히 ‘한라산 일구오공’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실제 등산객이 갈 수 있는 최고 지점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탐방로 기준 정상 높이는 1929m. 합법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한민국 최고 높이’다. 이름에도 그 의미가 담겨 있다.
한라산(漢拏山)의 한자에는 ‘은하수를 만질 수 있을 만큼 높은 산’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여기에 제주 신화가 더해진다. 설문대할망이 치마폭에 흙을 날라 산을 쌓은 후 이곳에 앉아 빨래를 했는데 앉기가 불편해 산꼭대기를 뜯어 던지면서 백록담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던져진 부분이 산방산(395m)이 됐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백록담이란 이름 역시 ‘흰 사슴(백록·白鹿)이 물을 마시던 곳’이라는 전설에서 비롯됐다. 그렇게 자연과 신화 위에 한라산의 서사가 더해졌다.
한라산 산행의 묘미는 접근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백록담으로 향하는 길은 단 두 갈래,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다. 성판악은 경사가 완만해 ‘거북 산행’을 즐기기에 좋다. 관음사 코스는 다소 가파르지만 삼각봉대피소를 지나며 펼쳐지는 수직 절벽의 비경이 압권이다. 어느 길을 택하든 왕복 8~10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이지만 산길이 잘 정비돼 있어 꾸준히 걸을 지구력만 있다면 초보자도 가능하다.
식생의 변화 즐기며 19㎞ 대장정
등산 초보자라면 성판악 왕복 코스를, 경험자라면 관음사에서 백록담을 거쳐 성판악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선호한다. 이 경우 전체 산행거리는 약 19㎞다. 오를 때는 짧고 강하게, 내려올 때는 완만하게 이어져 무릎 보호에 도움이 된다.
한라산 산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높이에 따른 식생 변화다. 해안의 난대림에서 출발해 중산간 온대림을 지나 정상 부근 아고산대 구상나무 군락까지, 한반도의 자연을 압축해 놓은 거대한 식물원이다.
정상에서 운이 좋다면 ‘구름 바다’라 불리는 운해(雲海)를 볼 수 있다. 제주 특유의 바람과 습도가 만들어내는 ‘대자연의 장관’이자 긴 산행 끝에 주어지는 선물이다. 운해가 없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정상의 풍경은 도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단번에 밀어낸다. 육지의 산과는 다른 수평선의 정점이 탁 트인 경치를 선사한다. 그야말로 마음의 소화제처럼 가슴이 뻥 뚫리는 ‘한라산 약효’를 경험할 수 있다.
4월의 한라산은 두 계절이 공존한다. 제주 해안에는 유채꽃이 만발하지만 정상은 여전히 겨울이다. 아이젠과 방한 장비가 필요한 이유다. 입산 시간 통제도 엄격하다. 예약자에 한해서만 입산 가능하므로 인터넷 예약이 필수다.
하산 길에 마주하는 숲은 한라산의 또 다른 얼굴이자 위로다. 성판악으로 내려오는 길, 울창한 삼나무 숲이 피톤치드를 뿜어낸다. 구름을 뚫고 내려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는 이 길은 일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채우는 회복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 길 끝에서 어떤 오르막도 다시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마음의 근육이 자라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신준범 월간<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