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뒤뜰 마당에 심어놓은 튤립 새싹이 다시 올라오고 작약 뿌리에서는 여린 새순이 돋아난다. 본격적인 봄이 됐다. 몇 년 전 심은 벚나무는 어느덧 하늘을 제법 가릴 만큼 자랐다. 딱 이맘때면 어김없이 벚꽃이 만개한다.
벚꽃을 바라볼 때면 일본 유학 시절 도쿄공업대학 입구의 100년 된 벚꽃 길이 떠오른다. 일시에 피어나는 벚꽃의 작렬함, 밤이 되면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하얀 벚꽃의 고독한 기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밤늦도록 벚나무 아래에 앉아 끝없는 사념에 잠겼던 시절이다. 그때의 나는 지구로부터 홀로 벗어나있는 존재 같았다. 그런데 지금 뒤뜰에 심어놓은 벚꽃 아래 앉으니 지구 속 포근한 구름 아래에 안겨있는 느낌이다.
벚꽃을 상상하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영화 같은 장면이 하나 있다. 도쿄공업대학 벚꽃 길에서 밤늦도록 벚나무 아래 앉아있다가 집에 가려고 정문으로 걸어가던 순간이었다. 정장 차림의 젊은 남녀가 종이상자 위에 캔맥주를 올려놓고 마주 앉아있었다. 여자는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100년이 넘은 고목에서 만개한 하얀 벚꽃 아래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무슨 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까. 아무도 없는 침묵의 교정, 어둠을 밝히는 하얀 벚꽃. 노벨상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떠올랐다. 순간의 아름다움, 가까워질 수 없는 사랑, 하얀 눈과 고요, 침묵 속에 스며있는 감정, 그리고 덧없는 순간들. 벚꽃 아래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정취가 짧고도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태양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색깔
내가 사는 서울 종로 서촌의 필운대로 벚꽃 길도 벚꽃 시즌이 되면 벚꽃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인다. 벚꽃은 한꺼번에 피고 또 빠르게 진다. 이 짧은 시간은 ‘지금이 아니면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벚꽃이 한꺼번에 피고 빠르게 지는 이유는 짧은 기간 안에 수분을 마치고 씨앗을 맺기 위해서다. 그래서 꽃잎은 얇고 비와 바람에 쉽게 떨어진다. 일시에 꽃을 피워 수분을 빠르게 끝낸 뒤 잎을 키우는 것, 이 모든 과정은 햇빛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전략이다.
만개한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며 지고 나면 연두색 잎이 돋아난다. 세상은 연둣빛의 향연으로 새로운 계절을 연다. 우주 어딘가에 이런 색으로 계절을 시작하는 행성이 또 있을까? 연둣빛 이파리는 햇빛이 강해질수록 점차 짙어지며 건강한 청춘의 녹색으로 변해갈 것이다.
녹색은 왜 생명의 색일까. 우주에서 바라볼 때 지구에서 가장 넓게 펼쳐진 색은 녹색이다. 숲, 풀, 농작물, 해조류와 이끼까지 태양이 길러낸 생명의 대부분이 모두 녹색이다. 겨울이 되어 태양이 멀어지면 이 색은 마른 갈색으로 변한다. 정지된 죽음의 색은 녹색이 사라진 갈색이다.
봄날의 태양이 만드는 녹색은 생명의 출발점이다. 식물은 녹색 잎을 통해 광합성을 하고 생명체를 위해 산소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식물이 만들어낸 에너지를 먹고 살아간다. 먹이사슬의 시작은 바로 이 녹색 식물이다. 새봄의 잎이 연둣빛을 띠는 것은 아직 엽록소가 적기 때문이다. 광합성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연한 노란색 색소가 섞여 연두색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양 빛이 강해지면 엽록소가 증가하고 잎은 두꺼워지며 점차 짙은 녹색으로 변한다.
뉴턴의 발견
지구의 식물이 녹색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녹색 빛을 반사하기 때문이다. 식물의 엽록소는 파란빛과 빨간빛을 잘 흡수하고 녹색 빛은 흡수하지 않고 반사한다. 파란빛은 에너지가 강하고 빨간빛 역시 광합성 효율이 높다. 반면 녹색 빛은 효율이 낮다. 그래서 식물은 효율이 높은 파란빛과 빨간빛을 선택적으로 흡수해 광합성을 한다. 모든 빛을 흡수하지 않는 이유는 과도한 흡수로 잎이 과열되면 세포가 손상되기 때문이다. 녹색 빛을 반사함으로써 스스로 보호하는 셈이다.
깊은 바다의 홍조류는 파란빛을 잘 흡수하는 색소를 지니고 있다. 빛은 수심에 따라 흡수되는 파장이 다른데, 깊은 바다에는 파장이 긴 빨간빛은 거의 도달하지 못하고 파란빛만 깊이 스며든다. 깊은 바닷속이 파랗게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파란빛을 흡수하는 홍조류는 빨간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붉게 보인다. 이처럼 식물은 저마다의 환경에 맞게 빛을 효율적으로 흡수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이러한 빛을 처음 과학적으로 분석한 사람은 아이작 뉴턴이다. 그는 태양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빛이 무지개색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혀냈다. 태양 빛이 하얗게 보이는 이유는 무지개색 빛이 모두 섞여있기 때문이다. 물감을 섞으면 검은색에 가까워지지만 빛을 섞으면 오히려 흰빛이 된다.
만개한 벚꽃이 주는 아름다움, 연녹색이 전하는 생명의 기운은 1년 중 아주 짧은 순간이다. 일생에 이런 풍경을 즐기며 바라볼 수 있는 횟수도 제한적이다. 벚꽃잎이 흩날리는 나무 아래를 천천히 거닐며 이 짧은 봄을 마음에 담아본다.
이기진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