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컬 AI 시대의 격차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데이터의 누적 속도에서 결정된다…제조 현장에서 시작된 데이터의 흐름이 물류로, 건설로, 나아가 우리 가정의 일상을 돕는 서비스 로봇으로 이어질 때 한국의 피지컬 AI는 비로소 '세계 1위'라는 목표를 향한 실질적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정부가 피지컬 인공지능(AI)을 국가 생존 전략으로 명확히 선언했다.
대통령 직속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는 올해 2월 확정한 '대한민국 인공지능행동계획'에서 오는 2030년 피지컬 AI 세계 1위를 국가 목표로 못 박았고, 이재명 정부의 30대 선도프로젝트에는 휴머노이드 로봇 3대 강국 진입, 완전 자율주행차 상용화, AI 팩토리 전환 등 7개의 피지컬 AI 과제가 포함됐다.
산업통상부는 2026년 예산에서 피지컬 AI 개발에만 4022억 원을, AI 팩토리 선도 프로젝트에 2200억 원을 배정했고, 과기부는 AI 과학자·휴머노이드 원천기술 개발에 2342억 원을 투입한다. 방향은 명확하고, 의지도 확인됐다.
그렇다면 이 경쟁에서 진정한 승부처는 어디인가. 피지컬 AI의 핵심 기술은 시각·언어·행동을 결합한 VLA 모델, 즉 로봇이 보고·판단하고·행동하도록 학습시키는 기술이다. 거대언어모델(LLM)이 인터넷의 텍스트로 언어를 습득했듯, VLA 모델은 수백만 건의 '행동 데이터(robot action data)'를 통해 물리 세계를 학습한다. 로봇 팔이 부품을 조립하는 궤적, 양손이 협력해 물체를 집어 올리는 순간, 불규칙한 제품을 선별하는 감각-운동 데이터가 피지컬 AI의 학습 원료다. 그리고 이 원료의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6'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 1월 5일(현지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만달레이베이에서 열린 현대차그룹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차세대 전동식 아틀라스 시제품(왼쪽)과 아틀라스 개발형 모델이 무대에 공개돼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미국은 구글을 중심으로, 중국은 정부 주도의 '국가 휴머노이드 로봇 혁신센터'를 통해 이미 수억 건의 행동 데이터를 쓸어 담고 있다. 피지컬 AI 시대의 격차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데이터의 누적 속도에서 결정된다. 우리가 예산을 편성하고 협의체를 구성하는 사이, 경쟁국은 데이터 규모를 기하급수적으로 쌓아가고 있다. 한 번 벌어진 데이터 격차는 따라잡기 어렵다는 것을 반도체 산업의 역사가 이미 증명했다.
이 문제를 돌파하려는 시도 중 하나가 디지털 트윈 기반의 시뮬레이션, 즉 'Sim-to-Real' 전략이다. 가상 환경에서 수천만 번의 동작을 시뮬레이션해 실제 데이터 수집의 물리적·시간적 한계를 보완하는 방식이다. 엔비디아의 아이작 심(Isaac Sim), 구글의 MJX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기 쉬운 핵심이 있다. 시뮬레이션이 현실에서 작동하려면, 가상 세계 자체가 현실을 정확히 모델링해야 한다. 재료의 마찰력, 부품의 유연성, 공정의 불규칙성—이 모든 물리적 현실을 디지털 트윈에 담으려면 결국 실제 현장의 행동 데이터가 기초가 돼야 한다. 시뮬레이션은 데이터를 증폭하는 기술이지, 데이터를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다.
이 데이터가 지금 한국에서 특별히 절박한 이유가 있다. 우리 제조 현장은 인구 절벽이라는 구조적 위기와 마주하고 있다. 숙련 기술자의 고령화와 청년 유입 감소로 생산 현장의 인력 공백은 이미 현실이 됐다. 피지컬 AI와 휴머노이드 로봇은 이 공백을 메울 현실적 대안이다. 다시 말해, 행동 데이터 인프라 구축은 기술 경쟁의 문제를 넘어 국민의 삶과 산업 생존을 지키는 사회적 과제다.
국내에서도 변화의 조짐은 나타나고 있다. 국책연구기관들이 산·학·연 공동 활용을 위한 행동 데이터 팩토리 구축에 착수했고, 일부 기업은 규제 샌드박스 승인을 통해 실제 제조 공장에서 '데이터 플라이휠' 구조를 시도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시도들은 아직 파편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핵심 장벽은 기술이 아니라 데이터 소유권이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한 공정 노하우가 담긴 데이터를 기업이 외부와 공유하는 것은 영업비밀과 보안의 관점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해법은 두 가지 축으로 설계돼야 한다. 기술적으로는 '데이터는 현장에 머물되 학습 결과만 공유'하는 연합학습(Federated Learning)을 국가 표준으로 채택해야 하며, 제도적으로는 데이터 기여도에 따라 정부 연구개발(R&D) 사업 가점·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데이터 바우처·인센티브' 체계를 병행해야 한다.
아울러 로봇의 관절 각도, 토크(힘), 촉각 센서 데이터 등 '로봇의 오감'을 디지털화하는 공통 표준 규격을 확립해야 한다. 이 공통 언어 없이는 제조 현장의 데이터도, 가정용 서비스 로봇의 생활 데이터도, 의료 보조 로봇의 정밀 동작 데이터도 서로 연결되지 못한 채 사장된다.
과거 경부고속도로가 산업화 시대의 혈맥이었듯, 행동 데이터 플랫폼은 AI 전환 시대의 새로운 국가 혈맥이 될 것이다. 제조 현장에서 시작된 데이터의 흐름이 물류로, 건설로, 나아가 우리 가정의 일상을 돕는 서비스 로봇으로 이어질 때 한국의 피지컬 AI는 비로소 '세계 1위'라는 목표를 향한 실질적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서울대학교 전기·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KIST AI·로봇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그동안 인공지능·로봇 분야 연구를 수행하며 국가 과학기술 전략 수립과 대형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이끌어 왔다. 인공지능 기반 영상인식, 선별 및 전역 관제 등 다양한 AI 분야에서 다수의 원천기술을 개발해 산업 및 공공 영역에 확산시켰다. 과학기술 발전과 산업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석탑산업훈장을 수훈했고, 공학한림원 젊은 공학인상과 KIST 미래재단 석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