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닷새간의 한국 일정을 마치고 지난 9일 출국했다. 이번 방한은 SK하이닉스, 네이버, SK텔레콤 등과의 협력 논의는 물론 재계 총수들과의 회동, 대학 방문, 스타트업 관계자들과의 만남 등으로 빼곡하게 채워지만, 산업계 일정 못지않게 대중의 관심을 끈 장면들도 적지 않았다.
삼겹살과 기름소금장, 치킨 113박스, 두산베어스 시구, T1 페이커와의 만남, 그리고 국내외 최초 예능 출연인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까지. 글로벌 AI 기업 CEO의 방한은 웬만한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 못지않은 화제를 만들어냈다.
특히 방송 전 공개된 ‘골든(Golden)’ 댄스 영상은 온라인 조회수 1100만 회를 기록했고,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그가 방문한 장소와 먹은 음식, 입은 가죽 재킷까지 연일 화제가 됐다.
AI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한국을 찾았지만, 이번 방한은 기술과 산업을 넘어 대중문화와 소비 트렌드까지 연결되는 또 하나의 ‘젠슨 황 효과’를 보여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스타트업 업계의 관심은 남달랐다. 생성형 AI 열풍 이후 젠슨 황은 단순한 글로벌 기업 CEO를 넘어 수많은 창업가와 개발자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인물 중 한 명이 됐다. 실제로 이번 방한 기간 동안 그가 등장한 행사마다 수백 명의 개발자와 창업가들이 몰렸고, 그의 발언 하나하나가 스타트업 커뮤니티를 통해 빠르게 공유됐다.
국내외 최초 예능 프로그램 출연에 나선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유재석과의 유쾌한 대화와 인간적인 면모가 화제를 모았다.(사진 캡처: tvN)
설거지 소년에서 시총 1위 기업 CEO까지…스타트업이 열광한 이유
이번 방한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은 일정 중 하나는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출연이었다. 국내외를 통틀어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처음인 젠슨 황은 방송에서 AI 기술보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
지난 10일 방송된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젠슨 황은 이민자 소년에서 세계 최고 기업의 CEO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들려줬다. 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던 시절부터 파산 직전까지 몰렸던 엔비디아의 위기를 극복한 과정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공개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100%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실패는 곧 성장이다” “위대해지려면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을 전하며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실 이런 이야기가 스타트업 업계에서 더욱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젠슨 황의 성공 스토리가 전형적인 창업가 서사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자본이나 배경보다 실패와 위기를 반복하며 회사를 성장시킨 과정은 수많은 초기 창업가들이 공감하는 지점이다.
방송에서는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도 소개됐다. 젠슨 황은 1996년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편지를 받고 한국을 찾았던 일화를 공개하며 당시 직접 용산 전자상가를 돌며 명함을 나눠주고 그래픽카드를 판매했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한국과 엔비디아는 비슷한 시기에 성장했다”며 “한국의 인터넷 산업과 게임 산업이 성장하면서 엔비디아 역시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페이커와 같은 한국 게이머들이 없었다면 e스포츠는 지금과 같은 글로벌 현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유재석에게는 ‘MC 챔피언’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화사를 향한 팬심을 공개했으며, K팝 데몬 헌터스 OST ‘골든(Golden)’에 맞춰 춤을 추는 예상 밖의 모습도 보여줬다.
젠슨 황 유퀴즈 출연 모습 (사진 캡처: tvN)
삼겹살·치킨·페이커…AI 황제가 남긴 의외의 화제들
지난해 방한 키워드가 ‘치맥’이었다면 올해는 단연 ‘삼겹살’이었다.
최근 재계 총수들과의 만찬이 화제가 된 가운데 젠슨 황은 유퀴즈에서도 삼겹살 이야기를 꺼냈다. 특히 참기름에 소금을 섞은 기름소금장이 인상적이었다고 언급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지난해 “치맥보다 좋은 건 없다”는 발언이 화제가 됐다면 올해는 삼겹살과 기름소금장이 새로운 키워드가 된 셈이다. 출국 직전에도 그는 “제 삼겹살과 치킨 친구들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특유의 유머를 보여줬다.
치킨 사랑 역시 여전했다. 젠슨 황은 이번 방한 기간 중 BBQ 치킨 113박스를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고, BBQ는 이를 활용한 이른바 ‘젠슨 황 세트’ 마케팅에 나서기도 했다.
사실 ‘젠슨 황 효과’는 이미 지난해 한 차례 검증된 바 있다. 지난해 방한 당시 그가 “치맥보다 좋은 건 없다”고 말한 이후 관련 영상과 인터뷰가 온라인에서 확산되며 치킨 브랜드들이 잇따라 마케팅에 활용했다. 일부 치킨 프랜차이즈는 SNS 콘텐츠와 프로모션을 통해 젠슨 황 관련 게시물에서 높은 조회수와 참여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를 촬영하기 위해 시민들과 팬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번 방한 기간 동안 그의 동선마다 수많은 인파가 모이며 이른바 ‘젠슨 황 효과’를 실감케 했다. (사진 제공: 벤처스퀘어 장현철 기자)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이런 현상 자체도 흥미로운 사례로 받아들여진다. 과거에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의 소비가 마케팅으로 연결됐다면 이제는 기술 기업 CEO의 취향과 일상이 브랜드 자산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e스포츠 팬들의 관심은 T1의 페이커 이상혁 선수와의 만남에 집중됐다. AI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과 게임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이 만난 장면은 기술과 콘텐츠 산업이 만나는 상징적인 순간으로 평가받았다. 스타트업과 IT 업계에서는 이번 만남을 단순한 팬 이벤트 이상으로 바라봤다. AI 산업의 상징인 젠슨 황과 글로벌 e스포츠의 상징인 페이커가 한자리에 모인 장면은 기술과 콘텐츠가 결합하는 현재의 디지털 산업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평가도 나왔다.
두산베어스 시구 역시 화제를 모았다. 개발자 콘퍼런스 무대에서만 보던 젠슨 황이 야구장 마운드에 오른 모습은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됐고, 기술 업계 리더가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들어온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네이버 1784 사옥에 방문한 엔비디아 젠슨 황 CEO (사진 제공: 네이버)
CEO를 넘어 하나의 브랜드가 되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젠슨 황 효과’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젠슨 황이 방문한 식당이 화제가 됐고, 대만에서는 그의 맛집을 정리한 ‘젠슨 황 미식 지도’가 등장했다. 베트남에서도 그가 방문한 음식점과 동선이 관광 코스처럼 소비되며 관심을 모았다.
한국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삼겹살과 기름소금장, 치킨 113박스, 페이커, 유퀴즈, 야구장 시구까지. 그의 방한 일정 하나하나가 콘텐츠가 되고, 소비가 되고, 마케팅 소재가 됐다.
이는 최근 스타트업 업계에서 자주 언급되는 ‘파운더 브랜딩(Founder Branding)’의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기업의 브랜드 가치가 창업자 개인의 스토리와 연결되고, 창업자의 철학과 취향이 기업 이미지로 확장되는 현상이다.
실제로 젠슨 황은 엔비디아의 CEO이면서 동시에 엔비디아라는 브랜드 그 자체가 됐다. 검은 가죽 재킷만으로도 인식되고, 한마디 발언만으로 시장이 반응하며, 방문한 식당과 먹은 음식까지 화제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일론 머스크(Elon Musk)나 스티븐 잡스(Steve Jobs)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론 머스크의 한마디가 투자 시장과 소비자 반응을 움직이고,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철학과 혁신의 상징이 됐던 것처럼 기업 브랜드와 창업자 브랜드가 사실상 하나로 인식되는 것이다.
과거 글로벌 CEO들이 실적 발표와 신제품 공개로 주목받았다면 이제는 개인의 취향과 철학, 일상까지 하나의 콘텐츠가 되는 시대다. 젠슨 황의 이번 방한 역시 AI 협력 성과와 별개로 글로벌 기술 리더가 어떻게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되는지를 보여준 사례로 남게 됐다.
스타트업 업계가 젠슨 황에게 열광하는 이유도 단순히 엔비디아의 성공 때문만은 아니다.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던 소년이 세계 최고의 AI 기업을 만들기까지의 과정, 수차례의 위기와 실패를 견디며 회사를 성장시킨 창업가의 서사가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방한이 남긴 가장 큰 메시지는 AI 기술이나 반도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강력한 기술만큼이나 강력한 스토리가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위대한 기업 뒤에는 결국 사람들이 기억하는 창업자의 철학과 서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수많은 스타트업 창업가들이 젠슨 황에게 열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그는 엔비디아의 CEO가 아니라 기술과 비전, 그리고 스토리까지 브랜드로 만든 창업가이기 때문이다.
* 스타트업 생태계 기자단은 KAIA와 벤처스퀘어가 함께 운영하며 스타트업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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