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설계 복잡도가 높아지면서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 산업의 경쟁축도 달라지고 있다. 설계자가 각각의 툴을 사용하는 기존 방식에서 생성형 AI와 AI 에이전트가 설계·검증 과정에 직접 개입하고 여러 툴을 연결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면서다. 지멘스는 이러한 변화를 ‘AI-Native Design’으로 정의하고 설계부터 검증, 3D IC, 반도체 생애주기 관리까지 AI를 적용하는 EDA 전략을 제시했다.
11일 열린 지멘스 EDA 기자간담회에서도 관심은 AI가 실제 반도체 개발 현장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에 집중됐다. 엔비디아와의 협력 배경부터 챗GPT·제미나이 등 AI 모델과 EDA의 연결 방식, 경쟁사와의 차별점, 한국 시장 전략과 검증 시간 단축까지 질문이 이어졌다.
지멘스가 제시한 방향은 특정 AI 모델이나 하드웨어에 종속되기보다 다양한 모델과 EDA 툴을 연결하는 개방형 생태계다. 동시에 Calibre(캘리버), Questa(퀘스타) 등 기존 EDA 엔진에 AI를 결합해 반도체 설계 과정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앙쿠르 굽타(Ankur Gupta) 지멘스 EDA 수석부사장 겸 IC EDA 부문 총괄이 ‘Siemens EDA Forum Seoul 2026’에서 AI 기반 반도체 설계 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제공: 지멘스)
엔비디아와 시작했지만 생태계는 열어둔다
AI 기반 EDA 전략에서 먼저 관심을 받은 것은 엔비디아와의 관계였다. AMD를 비롯한 AI 가속기 공급사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왜 엔비디아가 핵심 협력 파트너가 됐느냐는 질문이다.
지멘스 EDA 측은 엔비디아가 GPU 하드웨어뿐 아니라 CUDA를 비롯한 소프트웨어 스택과 자체 개발 라이브러리를 함께 갖추고 있다는 점을 배경으로 꼽았다. 엔비디아가 수년 전 EDA 업체들과 협력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현재보다 선택지가 제한적이었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풀스택을 갖춘 엔비디아와의 협력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는 설명이다.
다만 현재는 다른 기업과의 협력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하나의 GPU에서 다른 GPU로, 특정 기술 라이브러리에서 다른 라이브러리로 이동할 수 있는 ‘마이그레이션’ 역량도 중요하게 보고 있다.
챗GPT부터 제미나이까지…하나의 AI 모델에 묶이지 않는 EDA
생성형 AI가 에이전트로 발전하면서 챗GPT와 제미나이 등 외부 AI 서비스와 EDA를 어떻게 연결할지도 주요 질문으로 등장했다. 지멘스 EDA가 내놓은 답은 ‘BYOM(Bring Your Own Model)’이다.
그 중심에는 ‘Fuse(퓨즈)’가 있다. 퓨즈는 특정 AI 모델에 종속되지 않고 EDA 툴과 다양한 AI 모델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엔비디아 네모트론뿐 아니라 오픈AI와 구글, 앤트로픽 등의 모델과도 연동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AI 모델 시장의 변화 속도가 빠른 만큼 하나의 모델에만 의존하면 기술 대응이 늦어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각 EDA 툴의 API와 MCP 서버를 활용하면 고객사가 원하는 AI 모델을 직접 연결할 수도 있으며, 자체 AI 환경을 구축한 대형 고객은 퓨즈를 거치지 않고 개발환경에서 EDA 툴과 에이전트 모델을 연결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지멘스 EDA가 제시한 AI-Native Design은 하나의 AI가 설계자를 대체하기보다 설계자가 자연어로 AI 에이전트와 소통하고, 에이전트가 필요한 EDA 툴과 데이터를 찾아 작업하는 구조에 가깝다.
앙쿠르 굽타 지멘스 EDA 수석부사장이 기자간담회에서 지멘스 EDA의 에이전틱 AI 전략과 엔비디아 협력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 지멘스)
AI 시대에도 경쟁력은 ‘좋은 엔진’
시놉시스와 케이던스 등 글로벌 EDA 기업들과의 차별점에 대해서는 Calibre, Questa, Solido 등 개별 제품과 이를 연결하는 플랫폼을 경쟁력으로 제시했다. 여러 에이전트가 다양한 툴과 소통하는 환경에서는 각각의 작업을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 ‘양질의 엔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지멘스는 관련 영역에 수십 년간 약 250억 유로를 투자했으며 IC 설계뿐 아니라 패키징과 시스템, 소프트웨어까지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있다. 한국 시장의 구체적인 매출이나 시장점유율 목표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사업 성장에 맞춰 국내 인력도 지속적으로 충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성장 영역으로는 기존 IC 설계와 함께 AI 솔루션, 3D IC, 소프트웨어 정의 시스템 등을 꼽았다. 행사장에도 AI 기반 IC·전자설계 솔루션과 3D IC 설계·멀티피직스·열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 등을 소개하는 부스가 마련됐다.
반도체 생애주기까지 연결하는 ‘SLCM’
EDA와 지멘스의 기존 PLM(Product Lifecycle Management) 사업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도 관심을 받았다. 지멘스는 이를 반도체 산업에 맞춰 구체화한 SLCM(Semiconductor Lifecycle Management), 즉 ‘반도체 생애주기 관리’로 확장하고 있다.
반도체가 칩 하나의 설계를 넘어 칩과 칩, 보드와 보드, 패키지와 시스템이 연결되는 구조로 발전하면서 EDA와 기계설계, 시뮬레이션, 생애주기 관리의 연계도 중요해지고 있다는 판단이다. 마이크론을 비롯한 기업들이 SLCM을 위한 Teamcenter를 도입한 사례도 소개했다.
3D IC에서는 반도체 설계뿐 아니라 기계적 응력과 열, 냉각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지멘스는 EDA와 PLM, Simcenter 등 기존 포트폴리오를 연결해 설계 단계에서 시스템 수준의 문제까지 분석하는 환경을 구축하고 있다.
검증에 걸리는 2~3주 줄인다…Questa·Tessent 결합
AI-Native Design이 실제 반도체 개발 시간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도 현장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반도체 개발에서 검증은 설계 오류를 찾아내는 핵심 과정인 동시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단계다.
지멘스 EDA가 강점으로 내세운 대표 제품은 물리 검증 솔루션 Calibre다. 회사 측은 전 세계 상위 100대 반도체 기업 가운데 98곳이 Calibre를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능 검증에서는 Questa와 Tessent의 결합을 강조했다. Questa를 이용해 RTL 등의 기능을 검증하고 Tessent와 함께 ATPG(Automatic Test Pattern Generation) 패턴을 시뮬레이션하면 기존 방식 대비 약 3~5배 빠른 처리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향후에는 이를 10배 수준까지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현재 일부 검증 과정에 통상 2~3주가 걸리는 만큼 속도 개선은 전체 반도체 개발 기간 단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날 지멘스 EDA가 강조한 것은 AI 모델 자체보다 AI가 실제 반도체 설계 현장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는 연결 구조와 검증된 EDA 엔진이었다. AI 모델이 빠르게 바뀌는 상황에서도 반도체 설계에서는 결과의 정확성과 검증 가능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AI-Native Design’의 경쟁력 역시 설계부터 검증까지 이어지는 복잡한 개발 과정을 얼마나 빠르고 신뢰할 수 있게 바꿀 수 있느냐에서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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