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샌드박스는 기존 법과 제도로 허용하기 어려운 서비스를 일정 기간 시장에서 검증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다. 기업은 한시적인 규제 특례 아래 이용자와 거래 데이터를 확보하고 정부는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제도화 여부를 판단한다. 문제는 실증을 마친 기업이 정식 인가 단계에서 어떤 지위를 갖는지 명확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 ‘소유’를 4년간 운영해온 루센트블록이 조각투자 장외거래소 예비인가를 다시 신청할 수 있는 절차를 요구하고 나섰다.
루센트블록은 지난 12일 대전 호텔인터시티에서 열린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 초청 소통 간담회’에 참석해 수익증권 장외거래중개업 예비인가의 추가 신청 기회를 마련해달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루센트블록 로고 (자료 제공: 루센트블록)
간담회는 대한상공회의소와 규제합리화위원회가 공동 주최했다. 박용진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과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 기업인들이 참석해 정부 규제 정책과 메가특구 추진 현황을 공유하고 산업 현장의 규제 개선 과제를 논의했다.
발언자로 나선 허세영 루센트블록 대표는 조각투자 장외거래소 신규 인가 수가 최대 2개로 제한되면서 규제샌드박스를 통해 서비스를 검증한 기업이 제도권 진입 기회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기존 예비인가 사업자의 본인가 절차가 진행 중인 만큼 추가 신청 절차가 늦어질수록 실제 시장 진입 가능성도 낮아진다는 입장이다.
조각투자 장외거래소 인가는 정확히는 비금전신탁 수익증권을 거래하는 ‘수익증권 장외거래중개업’을 대상으로 한다. 시장에서는 STO 거래소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번 인가 범위에 투자계약증권 거래는 포함되지 않는다.
금융위원회는 2025년 5월 조각투자 유통플랫폼을 위한 전용 투자중개업 인가단위를 신설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을 예고했다. 당시 금융위는 금융혁신지원 특별법에 따라 혁신금융서비스로 운영해온 조각투자 유통플랫폼을 공식 제도화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2025년 9월 23일부터 10월 31일까지 예비인가 신청을 받은 결과 KDX와 루센트블록, NXT컨소시엄 등 3개사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금융위원회는 투자자 보호와 시장 효율성을 이유로 인가 수를 최대 2개로 정하고 외부평가위원회의 일괄평가를 거쳤다.
지난 2월 금융위원회는 평가 점수가 높은 KDX와 NXT컨소시엄에 예비인가를 부여했다. 루센트블록은 3개 신청사 가운데 예비인가 대상에서 제외됐다.
‘샌드박스의 출구’인가, 새로운 유통시장 인가인가
이번 논쟁의 핵심은 규제샌드박스에서 쌓은 실적을 정식 인가 과정에서 어떤 기준으로 반영할 것인가에 있다. 루센트블록은 정부의 특례를 받아 서비스를 검증하고 투자자 보호 체계를 구축한 사업자에게 다시 경쟁할 수 있는 통로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센트블록은 2021년 혁신금융서비스 사업자로 지정된 뒤 2022년부터 부동산 조각투자 서비스 소유를 운영했다. 회사에 따르면 약 50만명의 이용자를 확보했으며 누적 300억원 규모의 수익증권을 발행·유통했다.
전자등록 수익증권을 기반으로 한 유통 시스템을 구축하고 4년간 운영사고 없이 서비스를 제공한 점도 실증 성과로 제시했다. 실제 시장에서 투자자와 거래 시스템을 운영하며 확보한 경험이 정식 제도 전환 과정에서 평가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허 대표는 “규제샌드박스는 기업이 한시적 특례 아래 시장을 검증하고 그 결과에 따라 정부가 법령을 정비해 공식 제도로 전환한다는 전제에서 설계된 제도”라며 “실증을 거쳐온 사업자가 제도권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다시 신청할 기회를 열어 제도에 대한 신뢰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의 해석은 차이가 있다. 금융위는 샌드박스 사업자에게 허용됐던 유통 업무가 각 사업자가 발행한 수익증권을 자체 고객 사이에서 거래하도록 한 한시적·제한적 채널이었다고 설명한다.
새로 도입된 장외거래소는 발행 주체와 기초자산에 관계없이 여러 조각투자 상품을 거래하는 자본시장 인프라다. 주문 처리와 거래 체결, 결제 연동, 불공정거래 예방 등 유통시장 운영 역량이 요구되기 때문에 샌드박스 사업과 별도의 심사 기준을 적용했다는 입장이다.
발행과 유통을 분리한 제도 구조도 영향을 미쳤다. 조각투자 사업자는 기초자산을 발굴해 수익증권을 발행하는 ‘수익증권 투자중개업’과 다양한 상품의 거래를 중개하는 ‘수익증권 장외거래중개업’ 가운데 사업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금융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루센트블록은 발행 인가 신청을 철회하고 장외거래소 인가 경쟁에 참여했다.
루센트블록은 이날 개선방안으로 일정 요건을 충족한 혁신금융사업자에게 추가 예비인가 신청 기회를 제공하고, 규제샌드박스 사업이 정식 제도로 전환될 때 적용할 ‘실증-제도화-지속 운영’ 절차를 표준화해달라고 요청했다.
허 대표는 “기존 사업자에게 자동 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4년간 쌓은 실증 성과와 투자자 보호 실적을 바탕으로 다시 도전할 기회를 요청하는 것”이라며 “추가 예비인가의 문이 조속히 열려야 실제 경쟁 기회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추가 인가 여부만큼 중요한 과제는 규제샌드박스의 실증 성과를 정식 인가에서 어떻게 반영할지 사전에 명확히 정하는 일이다. 실증 기업에 자동 진입을 보장하면 시장 인프라에 필요한 별도 심사와 투자자 보호 원칙이 약해질 수 있고, 실증 경험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면 기업이 정부를 믿고 규제 시장을 개척할 유인이 줄어든다. 실증 성과의 평가 방식과 추가 신청 조건, 제도 전환 일정을 투명하게 제시하는 것이 이번 논쟁을 넘어 규제샌드박스 전체의 신뢰를 좌우할 기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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