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초 전 세계 헬스케어 자본과 제약·바이오 기업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모인다. 글로벌 헬스케어 투자 행사인 JP모간 헬스케어 콘퍼런스(J.P. Morgan Healthcare Conference, 이하 JPMHC)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글로벌 제약사와 바이오기업, 투자자가 한자리에 모이는 만큼 이곳에서 오가는 투자와 기술협력, 사업 전략은 한 해 헬스케어 산업의 방향을 가늠하는 지표로 활용된다.
올해 JPMHC를 관통한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역시 AI였다. 다만 관심은 새로운 AI 모델 자체보다 신약개발과 임상, 의료행정 등 실제 헬스케어 산업에 AI를 적용해 성과를 만드는 단계로 이동했다. 기술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어떤 데이터를 확보하고 실제 연구와 의료 현장에 어떻게 적용해 개발 기간과 비용을 줄일 것인지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발표가 엔비디아(NVIDIA)와 일라이 릴리(Eli Lilly)의 협력이다. 양사는 향후 5년간 최대 10억달러(약 1조 4,000억 원)를 공동 투자해 AI 공동 혁신 연구소(Co-Innovation AI Lab)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엔비디아의 바이오·신약개발 AI 플랫폼 ‘바이오네모(BioNeMo)’ 등을 활용해 AI와 자동화, 로보틱스를 신약개발 과정에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다. 단순한 기술 공급을 넘어 AI 기업과 글로벌 제약사가 신약개발의 연구·실험 인프라를 함께 구축하는 전략적 동맹에 가깝다.
엔비디아(NVIDIA)와 일라이 릴리(Eli Lilly) (출처: 엔비디아 뉴스룸)
이러한 흐름은 JPMHC뿐 아니라 JP모간이 별도로 발표한 2026년 헬스케어 전망에서도 확인된다. 의료 AI 기업의 경쟁력은 기술 정확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임상·행정 데이터를 얼마나 확보하고 이를 의료진의 실제 업무 과정에 통합해 생산성과 비용 구조를 개선하느냐가 중요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글로벌 헬스케어 자본이 바라보는 변화와 국내 스타트업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고 있을까. 데이터와 의료 워크플로, AI 신약개발 플랫폼, 글로벌 사업화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의 움직임과 K-헬스테크의 현재를 살펴봤다.
AI 정확도보다 중요한 것은 데이터와 의료 워크플로
글로벌 의료 AI 시장의 경쟁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 얼마나 정교한 모델을 개발했는지를 넘어 어떤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으며 그 기술이 실제 병원의 진료와 임상 과정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가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요소로 부상했다.
미국 생명공학 스타트업 네트워크 바이오(Network Bio)는 데이터 인프라에서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 주요 연구병원과 대학 의료센터의 바이오뱅크를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환자의 조직·혈액 샘플과 임상 결과, 분자 데이터를 결합해 AI가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한다. 기관별로 흩어진 데이터의 표준을 맞추고 AI 학습에 활용할 수 있는 ‘AI-Ready’ 바이오 데이터셋으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국내에서도 의료 현장에서 축적되는 서로 다른 데이터를 결합해 임상적 가치를 만들어내려는 스타트업이 등장하고 있다. 카카오벤처스와 슈미트의 시드 투자를 거쳐 올해 글로벌 팁스(TIPS)에 선정된 예지엑스(Yeji X)가 대표적이다.
예지엑스는 혈액검사 등 전자의무기록(EHR)과 흉부 엑스레이 같은 의료영상을 결합한 멀티모달 AI를 개발하고 있다. 서로 다른 형태의 의료 데이터를 함께 분석해 심부전 환자의 30일 내 재입원 위험을 예측하는 것이 핵심이다. 글로벌 팁스 선정을 계기로 미국 법인을 설립하고 현지 시장 진출에도 나섰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국내에서 확보한 AI 성능을 해외에서도 그대로 구현하는 것만은 아니다. 미국은 병원의 데이터 구조와 의료진의 업무 방식, 보험과 수가 체계, 규제 환경이 한국과 다르다. 한국 의료 시스템에서 작동하던 AI가 미국 병원의 워크플로에서도 임상적 효용과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입증해야 한다.
결국 의료 AI의 데이터 경쟁은 데이터를 많이 보유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데이터를 연결하고 의료진이 실제 의사결정에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한 뒤 기존 의료 시스템 안에 자연스럽게 통합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
JP모간 시드니 (출처: JP모간 미디어 센터)
바이오 AI의 승부처는 모델이 아니라 개발 플랫폼
AI 신약개발에서도 경쟁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엔비디아와 일라이 릴리의 협력이 보여주듯 AI는 특정 후보물질의 가능성을 예측하는 도구를 넘어 연구와 실험, 후보물질 발굴과 최적화를 연결하는 R&D 인프라로 진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단일 알고리즘의 성능과 함께 신약개발 파이프라인 전체의 효율성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는지가 중요해졌다.
영국의 아이소모픽 랩스(Isomorphic Labs)는 이러한 플랫폼 경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AI를 이용해 질병 표적과 약물 간 상호작용을 분석하고 치료 후보물질을 설계하는 신약개발 플랫폼을 구축했다. 특정 결과를 한 차례 예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고 설계하는 과정 자체에 AI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국내에서는 애스톤사이언스(Aston Science)가 AI와 면역학을 결합한 신약개발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AI 기반 항원결정기 예측 모듈을 활용해 환자 맞춤형 암 치료 백신의 항원을 예측하고 백신 후보물질을 설계한다. 항원 예측과 면역학 연구, 전달체 최적화 등을 연결해 후보물질 도출과 최적화에 필요한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목표다.
정부 R&D와 임상 개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8월 보건복지부의 도전혁신형 의료기술개발사업인 한국형 ARPA-H 프로젝트 ‘미정복 질환 임무’ 과제에 애스톤사이언스가 주관하는 ‘환자 맞춤형 항암백신 개발 플랫폼 구축(PAVE)’이 선정됐다. 올해 6월에는 회사가 개발 중인 위암 백신이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희귀의약품 지정을 받았다.
아직 AI 신약개발 플랫폼의 경쟁력을 실제 신약 상용화 성과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이른 단계다. 다만 글로벌 시장의 경쟁 기준이 AI 모델의 정확도를 넘어 후보물질 발굴과 검증, 임상 진입까지 이어지는 전체 개발 과정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타깃 발굴부터 임상 진입까지 신약개발 전 과정의 생산성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는지가 바이오 AI 기업의 기술력과 사업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노을 AI 기반 자궁경부암 진단 솔루션 miLab CER (사진 제공: 노을)
글로벌 진출은 초기 기술 설계에서 시작해야
글로벌 헬스케어 시장 진출은 국내 사업의 단순한 연장선으로 보기 어렵다. 제품을 설계하는 단계부터 진출 국가의 의료 시스템과 데이터 구조, 규제와 병원 업무 환경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플로렌스 헬스케어(Florence Healthcare)는 의료 현장의 워크플로를 사업의 중심에 놓은 사례다. 제약사와 임상시험수탁기관(CRO), 병원이 임상시험을 운영하는 과정을 디지털화하고 관련 데이터를 연결하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최근에는 이러한 임상시험 워크플로에 AI를 결합해 반복적인 업무를 자동화하는 방향으로 서비스를 확장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글로벌 의료환경을 고려한 제품 설계로 해외 시장에 진입하는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노을(Noul)은 혈액과 암 진단 과정을 자동화하는 AI 기반 진단 플랫폼을 개발한다. 대형 검사실 인프라에 의존하지 않고 현장에서 진단할 수 있도록 검사 과정과 AI 분석을 하나의 장비 안에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유럽과 중남미를 비롯한 해외 의료시장에서도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올해 6월에는 중소벤처기업부의 ‘글로벌 강소기업 1000+ 프로젝트’에도 선정됐다. 수출 성장 가능성이 높은 중소기업을 선정해 해외 마케팅과 금융 등을 연계하는 사업이다.
플로렌스 헬스케어와 노을의 사업 영역은 다르지만 두 사례에서 확인되는 공통점은 기술이 실제 의료 현장에서 사용되는 방식까지 제품에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료 AI의 글로벌 경쟁력은 알고리즘을 해외에 판매하는 것보다 각 국가의 의료 시스템 안에서 기술이 작동하도록 설계하는 능력에 가까워지고 있다.
JP모건은 AI가 아니라 AI 산업화를 말한다
JPMHC와 JP모간의 2026년 헬스케어 전망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이제 경쟁의 중심은 AI 기술 자체가 아니라 AI를 산업의 생산성과 사업모델로 전환하는 데 있다. 의료 AI 역시 알고리즘의 성능을 넘어 어떤 데이터를 확보하고 이를 임상과 연구 과정에 어떻게 적용하는지, 의료진과 제약사에 어떤 실질적인 가치를 만들어내는지가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국내 정책도 이러한 변화에 맞춰 기술창업 지원의 규모와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중기부는 초격차 스타트업 1000+ 프로젝트(DIPS)를 통해 AI·빅데이터, 바이오·헬스 등 딥테크 분야 스타트업의 기술사업화와 해외 진출을 지원하고 있으며, 팁스 역시 초기 기술창업 지원에서 스케일업과 글로벌 진출까지 기업의 성장 단계에 따라 지원하는 구조로 확대되고 있다. 글로벌 팁스는 해외 벤처캐피탈 등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한 국내 기술창업기업의 글로벌 성장을 지원한다. 단순히 해외 진출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보다 글로벌 투자와 R&D, 사업화를 연결해 국내 스타트업이 초기 단계부터 해외시장을 목표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지원 규모가 커지는 만큼 정책의 다음 과제도 분명해진다. 헬스케어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에는 기술개발 자금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다. 국가마다 다른 의료 데이터와 규제, 임상 검증, 병원 도입 절차와 보험·수가 체계까지 넘어야 실제 매출로 이어질 수 있다.
글로벌 팁스와 같은 지원 프로그램에서도 현지 의료기관과의 연결과 임상 검증, 규제 대응, 데이터 확보, 사업모델 설계까지 지원 범위를 보다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현지 의료 시스템을 이해하는 전문가와 병원, 투자자 네트워크가 초기 단계부터 연결된다면 기술을 개발한 뒤 해외 판로를 찾는 기존 방식과는 다른 글로벌 성장경로를 만들 수 있다.
K-헬스테크의 글로벌 경쟁력도 결국 기술의 정확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차별화된 의료 데이터를 확보하고 이를 임상과 진단 등 실제 의료 현장의 문제 해결에 적용한 뒤, 국가마다 다른 의료 시스템과 규제 환경에서도 작동할 수 있도록 워크플로를 설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의료기관과 환자에게 어떤 임상적·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내는지까지 증명해야 글로벌 사업으로 확장할 수 있다.
JPMHC가 보여준 2026년 헬스케어의 변화는 AI 기술의 등장이 아니라 AI가 산업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가깝다. 데이터에서 시작해 임상 가치와 의료 워크플로, 경제적 가치와 글로벌 확장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누가 먼저 완성하느냐의 경쟁이다. 예지엑스와 애스톤사이언스, 노을을 비롯한 국내 스타트업도 각자의 기술과 시장에서 그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이제 정부 지원 역시 기술을 개발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기술이 글로벌 의료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사업으로 성장하는 과정까지 함께 설계할 필요가 있다.
출처: 중소벤처기업부 <2026년 팁스 창업기업 지원계획 수정 공고>, 중소벤처기업부 중소벤처기업연구원 <2026년 팁스(TIPS) 창업기획 지원계획 공고>, JP Mor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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