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을 사고파는 개인 중심 시장에서 출발한 크립토가 기관금융의 영역으로 빠르게 들어오고 있다. 스테이블코인과 탈중앙화금융(DeFi), 실물자산 토큰화(RWA)를 넘어 전통 금융의 인프라 자체를 온체인으로 옮기려는 움직임도 빨라졌다. 투자자의 질문 역시 ‘크립토가 필요한가’에서 ‘어떤 금융이 온체인으로 이동하고, 누가 그 시장을 선점할 것인가’로 바뀌고 있다.
글로벌 벤처캐피털 앤드리슨 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 a16z)가 1일 서울 조선 팰리스 강남에서 연 ‘a16z 크립토 코리아 써밋(a16z crypto Korea Summit)’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행사 전반을 관통했다. a16z 크립토가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개최한 첫 서밋이다.
a16z 크립토가 1일 서울 조선 팰리스 강남에서 한국 첫 자체 행사인 ‘a16z 크립토 코리아 써밋’을 개최했다. (왼쪽부터) 박성모 a16z 크립토 아시아태평양 GTM 총괄, 마일스 제닝스 정책 총괄 겸 법무 총괄, 가이 울렛 제너럴 파트너
이날 행사에는 a16z 크립토 주요 파트너와 모르포(Morpho), 캔톤 네트워크(Canton Network) 개발사 디지털에셋(Digital Asset), 옵티미즘 개발사 OP Labs, 라이터(Lighter) 등 글로벌 블록체인 기업 경영진이 참석했다. 논의는 글로벌 디지털자산 정책과 투자에서 출발해 기관금융의 온체인 전환, 스테이블코인, AI 시대의 크립토 인프라까지 이어졌다.
a16z 크립토가 지난 6월 아시아 첫 오피스를 서울에 연 뒤 한국에서 첫 자체 서밋을 개최했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현장에서는 한국의 높은 디지털 기술 수용도와 활발한 크립토 이용자층뿐 아니라 금융기관과 대기업이 새로운 기술을 검토하고 있다는 점이 거듭 언급됐다. 투자 기업의 이용자를 가까이에서 이해하고 국내 기업과 포트폴리오 기업 사이의 협력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현지 거점이 필요하다는 설명이 나왔다.
가이 울렛(Guy Wuollet) a16z 크립토 제너럴 파트너가 바라본 시장 역시 초기 개발자와 개인 이용자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크립토가 금융기관과 기업이 참여하는 산업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스테이블코인이 결제를 넘어 예치와 대출, 거래 등 금융 서비스로 연결되고 기관의 온체인 참여가 늘면서 크립토와 기존 금융을 나누던 경계도 옅어지고 있다는 시각이다.
규제 명확해지자 기관이 움직인다…한국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험대
기관금융이 온체인으로 이동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조건으로는 규제의 명확성이 꼽혔다.
마일스 제닝스(Miles Jennings) a16z 크립토 정책 총괄 겸 법무 총괄은 정책 키노트에서 기업이 기존 규제 체계 안에서 준법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어떤 자산과 서비스에 어떤 규칙이 적용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고 봤다. 규칙이 구체화될수록 금융기관과 기업도 시장에 참여하기 쉬워진다는 얘기다.
마일스 제닝스 a16z 크립토 정책 총괄 겸 법무 총괄이 ‘a16z 크립토 코리아 써밋’에서 발표하고 있다.
한국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도 주요 관심사였다. 현장에서는 한국이 은행을 중심으로 발행 주체를 논의하는 것과 달리 미국은 은행만을 발행 주체로 한정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거론됐다. 제닝스는 지나치게 제한적인 구조에서는 기존 금융상품과 차별화된 서비스가 나오기 어렵고 혁신 속도 역시 떨어질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반대로 일정한 가드레일을 마련하되 다양한 사업자가 경쟁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을 기반으로 새로운 금융상품과 서비스가 등장할 여지가 커진다. 미국의 규제 변화뿐 아니라 한국에서 진행 중인 원화 스테이블코인 관련 입법이 주목받는 이유다.
이어진 파이어사이드 챗에서는 규제 이후 열릴 투자 시장으로 논의가 옮겨갔다.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결제 수단을 넘어 예치와 대출, 거래를 연결하는 금융 인프라로 발전하고 있고, 온체인 예측시장처럼 정보 자체가 거래되고 가격에 반영되는 새로운 서비스도 등장하고 있다.
가이 울렛 a16z 크립토 제너럴 파트너와 폴 카피에로 a16z 크립토 커뮤니케이션 파트너가 ‘a16z 크립토 코리아 써밋’에서 크립토 시장의 투자 흐름과 온체인 금융의 변화에 대해 대담하고 있다.
‘다음 1조 달러’는 어디서 오나…전통 금융의 온체인 전환
기관금융의 변화는 ‘기관 금융 레일 경쟁: 다음 1조 달러는 누가 온체인으로 가져올 것인가?’ 패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뤄졌다. 매기 수(Maggie Hsu) a16z 크립토 GTM 총괄의 진행으로 폴 프람봇(Paul Frambot) 모르포 공동창업자 겸 CEO, 유발 루즈(Yuval Rooz) 디지털에셋 공동창업자 겸 CEO, 징 왕(Jing Wang) OP Labs CEO가 참여했다.
핵심은 기존 자본시장의 자산과 유동성을 어떻게 온체인으로 옮길 것인가였다. DeFi를 활용하면 자금 공급자와 수요자를 온체인에서 연결하고 기존 금융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부 중간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 역시 결제에 머무르지 않고 대출과 이자, 자산 운용으로 연결되면서 활용 범위가 넓어진다.
기관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공개성과 프라이버시 사이의 문제도 풀어야 한다. 금융기관은 모든 거래 데이터를 공개 블록체인에 그대로 올릴 수 없다. 거래 당사자와 데이터 접근 권한, 개인정보, 규제 준수 여부를 함께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캔톤 네트워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거래에 필요한 당사자만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구조가 기관금융의 중요한 조건으로 거론됐다.
한국 시장은 개인과 기관 사이의 간극이 큰 시장으로 평가됐다. 크립토를 사용하는 개인 이용자층은 두텁고 디지털 금융에 대한 이해도도 높은 반면 기관의 움직임은 규제와 기존 금융 시스템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디다. 다만 금융기관과 대기업이 실제 활용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어 제도가 정리되면 시장의 움직임도 빨라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달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지역 통화로 확장될 가능성도 제기됐다. 자본시장 자체가 온체인으로 이동하면 모든 이용자가 달러에 노출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유로와 멕시코 페소 등 각국 통화를 기반으로 한 스테이블코인이 등장하고 있으며, 향후에는 대출과 이자, 환헤지 같은 금융상품과 얼마나 연결되는지가 경쟁력을 가를 수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도 결국 발행 자체보다 사용처가 중요해진다. 온체인에서 결제하고 자금을 운용하며 대출이나 다른 금융상품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기존 원화 금융과 다른 효용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사람 대신 AI가 거래한다면…크립토가 노리는 다음 금융 인프라
행사 후반부에는 금융의 이용 주체가 사람에서 AI로 확대될 가능성이 화두로 올라왔다. 사람이 직접 상품을 고르고 카드를 꺼내 결제하던 방식에서 AI 에이전트가 구매와 계약, 결제를 대신한다면 기존 금융 시스템 역시 달라져야 한다는 관점이다.
AI 에이전트가 다른 에이전트와 거래하거나 국경을 넘어 소액을 주고받는 환경에서는 블록체인의 특성이 활용될 수 있다. 기존 금융망에서는 번거롭거나 비용이 큰 소액·국경 간 거래를 프로그램 가능한 자산과 결제 인프라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장에서는 AI와 크립토의 결합을 당장 거대한 시장으로 단정하지 않았다. 에이전트 간 거래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아직 AI 에이전트 자체의 활용이 충분히 확산되지 않았고 서로 거래해야 할 서비스와 이유도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함께 나왔다.
‘AI와 금융을 위한 크립토 인프라(Crypto’s Infrastructure Layer for AI and Finance)’ 세션에는 블라디미르 노바코브스키(Vladimir Novakovski) 라이터 창업자 겸 CEO가 참여했다.
한국의 제조 기반도 AI와 크립토가 만날 수 있는 영역으로 거론됐다. 산업용 로봇 활용도가 높은 제조 현장에서 로봇이 생성한 데이터를 학습 자산으로 만들고 여러 로봇이 경험을 공유할 경우 데이터의 생산과 거래를 둘러싼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관점이다. 한국 기업과 글로벌 크립토·AI 기업의 협업 가능성도 이 과정에서 언급됐다.
a16z가 서울을 아시아 첫 거점으로 선택한 배경에는 이런 여러 조건이 겹쳐 있다. 크립토 이용자가 많다는 것뿐 아니라 금융기관과 대기업, 스타트업, 제조업이 함께 존재하고 새로운 기술을 실제 시장에서 시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서밋에서 나온 질문 역시 가상자산 가격이나 거래량과는 거리가 있었다. 금융기관의 자산과 거래가 언제 온체인으로 이동할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어떤 금융상품과 연결될지, AI 에이전트가 경제 활동에 참여할 때 어떤 결제망이 필요할지가 주요 논점으로 올라왔다.
개인 투자자가 사고파는 자산에서 시작한 크립토는 이제 금융기관과 기업이 사용할 인프라를 두고 다음 경쟁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에 아시아 첫 거점을 마련한 a16z 역시 한국에서 그 변화가 얼마나 빠르게 현실의 금융과 산업으로 들어오는지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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