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부잣집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언니들과 터울이 있는 편이다. 공부하라는 꾸지람과 시집가라는 잔소리를 언니들에 비해 덜 듣고 자랐으니 막내로서 혜택을 톡톡히 누린 셈이지만 내 나름대로 억울한 점이 있다. 그건 바로 부모의 노환을 비교적 이른 나이에 맞이해야 한다는 점이다. 몇 주 전 난데없이 아버지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 응급실에서 위기를 넘기고 중환자실에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은 후 일반 병실로 옮기기까지 꼬박 3주가 걸렸다. 뇌 곳곳에 손상을 입은 아버지는 말을 거의 하지 못하고 거동 역시 불가능한 상태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기저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특대형’으로 말이다. 만일 ‘특특대형’이 있었다면 그걸 샀을 것이다. 소문난 거구인 아빠를 돌볼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싶었으나 아빠 곁을 지켜야 하니 서점도 도서관도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독서 플랫폼을 둘러보았다. 검색창에 ‘간병’을 써넣고 엔터를 누르니 돌봄의 고됨을 하소연하는 우중충한 책과 애써 씩씩한 척하는 명랑한 책 몇 권이 검색됐다. 나는 내가 어떠한 이야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것도 저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천하태평 금금이의 치매 엄마 간병기’라는 동화를 발견했다. 효심 지극한 금금이가 노모를 모시는 뻔한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으로 기대 없이 책을 펼쳤다. 하지만 ‘저어기 충청 전라 어름에 쪼글 할매가 살았는디, 딸도 없이 아들도 없이 영영 혼자라’ 하는 구성진 첫 문장에 마음을 홀랑 빼앗겨 버리고야 말았다.
저자 김혜원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보낸 10년을 바탕으로 이 동화를 집필했다고 한다. 긴긴 세월을 짧은 동화에 눌러 담은 덕일까. 문장 하나하나가 진하다 못해 걸쭉하다. 특히 저자가 판소리를 좋아하는 것이 신의 한 수로 작용했다. 판소리의 맛을 살려 쓴 글은 분명 낯설었지만 묘한 매력을 풀풀 풍겼다. 개중 생동감 넘치는 의성어와 의태어는 정말이지 압권이었다. 눈으로 읽기만 하는데도 판소리를 듣는 것처럼 넘실넘실 리듬감이 느껴지지 뭔가. 게다가 마침표가 찍힌 부분에서는 고수가 북채로 북의 굴레를 두드려 ”딱!“ 소리를 내는 것 같은 환청이 들리기까지 했다. 제아무리 난독증에 걸린 사람이라도 이 책은 즐겁게 완독할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한다. 나의 감상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책에 등장한 의성어와 의태어를 빌려 줄거리를 읊어볼까 한다.
한 할머니가 꼬부랑깽깽 자갈밭을 매는데 하늘에서 씨앗 하나가 피르르르 떨어졌다. 그 씨앗을 마당에 심자 넌출넌출 줄기가 뻗었고 이내 박통 하나가 덩더꿍 열렸다. 실근실근실근실근, 슥삭슥삭슥삭슥삭, 박을 타자 그 속에서 아이 하나가 나왔다. 할머니는 금쪽같이 귀한 아이의 이름을 ‘금금이’라 짓고 어화둥둥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엉금설설 기는 것도 아까워 업어 키운 것은 물론 달곰달곰 꿀떡, 쫄깃쫄깃 인절미, 길쭉길쭉 가래떡까지 해먹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먹는 거로 치면 우썩우썩 자라나야 하거늘 금금이의 키는 그대로였다. 할머니는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금금이를 성가셔하기는커녕 똥거름이 풍년이니 올 농사는 풍년일 거라며 제 딸을 둥게둥게 추어올렸다. 그렇게 금금이를 뒷바라지하던 할머니는 쪼글쪼글 쪼쪼글 꼬불꼬불 꼬꼬불 시나브로 늙어갔고 결국 치매라는 몹쓸 병에 걸린다.
그때부터였다. 아이처럼 누워 지내기만 하던 금금이가 부스스 일어나 제 엄마를 돌보기 시작한 건 말이다. 치매에 걸린 노모가 사는 집에 바람 잘 날이 없는 건 당연지사,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금금이는 부쩍 자라났고 노모는 아이처럼 작아지고야 만다.
”이제는 쪼글 할매 아주 얼뚱아기라 놀고 먹고 싸는 것만 으뜸일세. 쫄쫄쫄 오줌 싸고 떼룩떼룩 똥 눌 적마다 금금이 좋아라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둥둥둥 우리 어매 어화둥둥 우리 어매 오줌 싸서 이쁘고 똥을 싸서 이쁘고, 어매도 나 키울 제 내가 이리 이뻤던가. 똥거름이 풍년이니 올 농사는 풍년일세.“
저자는 부모가 늙고 병들고 나서야 뒤늦게 철드는 우리의 모습과, 나이가 들어 도로 아이가 되는 부모의 모습을 가슴 찡한 장면으로 담아냈다. 그 장면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근질하지만 이 책을 읽을 분들의 재미를 위해 슬쩍 건너뛰련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무렵 낮잠을 자던 아버지가 눈을 떴다. 당신 다리에 힘이 없는 줄 모르고 침대 난간을 움켜쥔 채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안 돼. 일어섰다가 넘어지면 머리 다친다! 어디 가려고 그래?“ 나는 아이에게 주의를 주는 부모처럼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대답 대신 입술을 달싹거리며 배를 문질렀다. 올 것이 왔음을 직감한 나는 상황이 이만저만한 관계로 침대가 곧 화장실임을 거듭 설명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아버지는 연신 ”아이고“ 소리만 반복했다. 아버지가 마지못해 일을 치르는 사이 나는 새 기저귀와 물티슈 따위를 꺼내며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잠시 후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에 ”실례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기저귀를 내렸다. 눈앞에 펼쳐진 황금빛 풍경에 마음속에서 판소리 한 곡조가 절로 뽑아져 나왔다. 얼씨구나, 대풍년이로구나!
이주윤
여러 작가의 문장을 따라 쓰다 보니 글쓰기를 업으로 삼게 됐다.
‘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문해력’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