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절을 맞아 고향으로 향하는 베이징발 기차. 중국 음력 설엔 어디 가나 사람이 북적이지만 베이징 기차역은 단연 최악이다. ”피란 행렬이 따로 없다“는 대사가 짧게 스쳤다. 지나갈 틈 없이 꼭 끼여 앉은 열차 안 무리들 속에 ‘젠칭’과 ‘샤오샤오’도 있다. 갓 졸업한 사회초년생이거나 대학생인 듯 보이는 이들. 사내 몇몇은 젠칭과 동향 친구들이지만 샤오샤오는 처음 만난 사이다. 청춘을 무기 삼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그들 사이에서 둘은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난다.
눈 내린 철로를 가다 서다 반복하더니 결국 멈춰버린 열차. 폭설로 인한 일시 멈춤이라지만 다시 움직일 기척이 없다. 설원 저 멀리 순록이 유혹해 길을 나섰다지만 핑계다. 멍하니 갇혀 있기엔 혈기 왕성한 청춘들이 기차에서 짐을 내린다. 다른 차를 얻어 타든 걸어가든 알아서 집으로 가기로 한다. 도중에 젠칭과 샤오샤오는 둘만 남게 되고 이제 서로를 더 알아가는 시간. 젠칭은 베이징에서 대학을 졸업하는 컴퓨터공학 전공자다. 취직보다 게임시장에 관심이 쏠려 있다. 컴퓨터 수리점 알바를 하며 게임 시나리오 짜기에 골몰한다. 샤오샤오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이런저런 일을 가리지 않고 해왔다. 겁 없고 넉살 좋고 소탈해 세상의 모든 영업에 어울릴 만한 인재 같은데 변변한 기회가 없다. 두 사람은 모두 ‘꿈의 도시’ 베이징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는 꿈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큰 집을 갖고 싶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힌 시골 출신의 가난한 청춘들. 결은 좀 다르지만 천방지축인 것도 닮았다.
둘은 내내 친구 사이일 뿐이라고 떠들지만 하는 짓(?)은 여간해선 떼어놓기 힘들 것 같은 껌딱지 커플. 연인도 아닌 남자 집에 들어와 동거하는 여자가 더 이상 ‘여사친’은 아니지 않나. 늙어도 못생겨도 부자거나 공무원이면 만나는 철딱서니 없는 여사친을 몇 번이고 받아주는 사내는 또 어떤가. 젠칭은 거리에서 불법 CD를 팔아 모은 돈으로, ‘팔자 고칠’ 연애에 매진하다 자꾸 실패하는 여자에게 끼니와 잠자리를 내준다. 꽤 뒤에야 비로소 둘의 격렬한 키스 장면이 나온다. 늦어도 너무 늦은 것 아닌가. 둘의 사랑놀이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것을.
두 청춘 남녀의 사랑은 열렬하게 아름답다. 가난한 연인들의 사랑이라 더 간절하다. 하지만 불투명한 현실이 가만 놔둘 리 없다. 균열과 보수를 반복하며 애틋한 사랑을 이어간 그들도 이제 지친 기색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늘 현실로부터 왔다. 어찌할 수 없는 벽, 꿈과 너무 먼 현실이 청춘을 마냥 괴롭힌다. 반지하방으로 이사하는 날 애지중지하던 누더기소파마저 버리고 떠나는 장면은 뿌옇고 먹먹하다. 삶이 궁핍하면 사랑도 가난해지고 마는 것인가. 해마다 사랑하고 춘절마다 고향에 함께 내려갔지만 어느새 시들해진다. 속을 숨겨보지만 몸살을 끝내 숨길 순 없다.
샤오샤오가 그의 방에서 떠난 날 뒤늦게 쫓아나간 젠칭은 전철에서 발견한 그녀를 잡았어야 했다. 하지만 잡았다 한들 또 떠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끝까지 견뎠다면,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면 둘은 내내 사랑했을까? 모든 가난한 삶과 사랑의 여정엔 마의 구간이 있고 그 순간만 잘 넘기면 행복해지는 것일까?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 늘상 하고 있는 질문인지 모른다.
‘놓친 사랑’과 ‘지금 사랑’ 사이
극 후반부 샤오샤오는 세상 모든 이가 궁금해한 그 질문에 답하고 있다. 헤어지고 10년 뒤 비행기 안에서 조우한 두 사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폭설로 비행이 미뤄지고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 처지가 된다. 오래전 기차 여행과 똑같다. 두 사람 모두 출장길. 하지만 젠칭은 아내와 아들을 둔 유부남이 돼있다. 둘은 한 개밖에 없는 룸에서 어색하게 밤을 지낼 수 없어 산책을 나간다. 과거의 일들이 대하처럼 흐르고 지난 사랑의 물결이 파도가 될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그러나 다 지난 날이다. 돌이킬 수 없고 돌이켜서도 안 될 일. 젠칭은 눈물이 북받쳐 오르고 그녀를 부둥켜안아 보지만 결국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말한다. 샤오샤오 역시 ”그때 붙잡았어도 또 헤어졌을 것“이라 말한다. ”왜 붙잡지 않았냐“는 볼멘소리도 진심이었지만 어쩌랴. 둘은 지나간 사랑의 그림자를 추억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다.
사랑 이야기인지라 가슴에 쏙 박히는 대사가 더러 있다. 10년 만에 조우한 그날 밤 ‘최우수 전 여친상’을 주고 싶다는 젠칭의 농담엔 가슴 저린 아픔이 있다. 항공편을 포기하고 함께 이동하기로 한 자동차에서 샤오샤오가 흘리듯 던진 말은 이 드라마의 키워드다. ”I miss you.“ 젠칭은 보고 싶었다는 말로 알아들었지만 샤오샤오의 뜻은 다르다. ”내가 널 놓쳤어.“ 그 마음 알겠어서 나도 찔끔거렸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꼭 그럴 일도 아니다. 끝까지 가보지 않았다면 어차피 죄다 ‘놓친 사랑’ 아닌가. 더 가본들 언젠가는 놓칠 사랑일 수도 있지 않은가. 지나고 보면 다들 그렇게 살았다.
문득 궁금하다. 진짜 사랑은 ‘놓친 사랑’인가, ‘지금 사랑’인가. 영원한 사랑이란 뭔가. 관계의 지속인가, 감정의 흔적인가. 사랑, 참 어렵다.
글 이상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