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따사로워지는 5월은 다채로운 문화 행사가 많이 열리는 달이다. 특히 5월 18일 '세계 박물관의 날'을 맞아 전국 박물관과 미술관이 참여하는 국내 최대 문화 축제인 '박물관·미술관 주간'이 5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 한 달간 이어진다. 2026년 박물관·미술관 주간의 주제는 '분열된 세상을 하나로 잇는 박물관(Museums Uniting a Divided World)'이다. 그 의미를 깊이 느껴볼 수 있는 박물관은 어디 있을지 고민하다가,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5년 공립박물관 평가인증' 자료를 살펴봤다.
공립박물관 평가인증은 등록 후 3년이 지난 공립박물관을 대상으로 최근 3년간의 운영 실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인증을 부여하는 제도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입구 (본인 촬영)
이번에 '우수 박물관'으로 선정된 박물관은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다.
체계적인 운영과 시설관리, 연구, 교육 및 체험 활동, 관람객 만족도 제고 노력 등 대부분의 평가 항목에서 평균을 크게 웃돌았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설립 목적 달성도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하여 직접 현장을 방문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붉은 벽돌의 외벽을 지녀, 건축적으로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본인 촬영)
전체 외벽을 붉은 벽돌로 지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박물관은 역사적 의미와 건축학적 의미를 담아 설계됐다고 한다. 지상 구조를 최소화하고 기억을 '땅속에 새긴다'는 의미를 담아 지하 공간을 활용한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순교자의 칼' 조각과 '수난자' 조각이었다.
'순교자의 칼' 조각 (본인 촬영)
순교자의 칼 조각은 조선시대 죄인들의 목에 씌웠던 칼을 형상화하여 중첩되게 배열한 조각으로, 이 땅에서 목숨을 잃은 의로운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자 만들어진 조각이라고 한다. 곧게 뻗어 나온 형태로 이는 고통 속에서 땅을 뚫고 나오는 의로운 이들의 기개를 상징하는 조각이라고 한다.
'수난자' 조각상 (본인 촬영)
한편, 머리만 놓여 있는 '수난자' 조각상은 식민의 유산을 떠안은 채 다가온 한국전쟁과 분단의 고통이 가시지 않은 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두 조각상의 의미를 살펴보며 타인을 향한 존중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표현될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박물관 안에 들어가자 고즈넉한 분위기가 나를 반겨줬다.
박물관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는 관람객들 (본인 촬영)
박물관 곳곳에는 예배를 보러 온 사람들부터 유물을 감상하러 온 사람, 그리고 차분하고 고요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고자 찾아온 사람 등 다양한 관람객들이 있었다.
성 정하상 바오로 조각상 (본인 촬영)
예배가 진행 중이었던 성 정하상 바오로 기념경당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나직하게 들려오는 성가 소리와 예배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평온해졌다.
성 정하상 바오로 기념경당 입구 (본인 촬영)
경당을 돌아 나와 긴 복도를 따라 걷자, 콘솔레이션 홀과 하늘광장이 보였다.
콘솔레이션 홀은 고구려 무용총 내부를 모티브로 하여 구현된 공간이다. 이곳에는 순교 성인 다섯 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미디어로 구현된 무용총 벽화 그림을 잠시 살펴보며 고요한 시간을 가진 뒤, 하늘광장으로 나갔다.
콘솔레이션 홀에서 홀로 사색하는 관람객 (본인 촬영)
하늘광장은 붉은 벽돌 벽, 그리고 탁 트인 하늘만이 보이는 공간이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조각들을 볼 수 있었다.
푸른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뻗어 있는 '영웅' 조각은 한 사람을 수직으로 길게 늘여 놓은 작품이다. 이는 '삶을 살아가며 누구나 타인의 선입견에서 비롯한 잘못된 시선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의 주인이고 영웅'이라는 메시지를 담아 설치된 조각이라고 한다.
하늘광장의 '서 있는 사람들' 조각 (본인 촬영)
그 맞은편에는 '서 있는 사람들' 조각이 있다. 이는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종교를 빌미로 박해받다가 순교해 성인의 반열에 오른 44명의 사람들을 형상화한 예술 작품이라고 한다.
두 조각상을 보며 분열의 문제가 끊이지 않는 혼란한 사회 속에서도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마음을 잃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반적으로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라 예술 작품을 보며 홀로 사색하기에 좋은 장소라고도 느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서소문 밖의 네거리가 지닌 시대의 기억과 역사적 가치를 바탕으로 세워진 박물관이다. 따라서 상설 전시관에서는 역사의 흐름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의 상설 전시관 (본인 촬영)
조선시대 사상사를 중심으로 천주교와 서학, 동학, 각종 종교 신앙 등이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살펴볼 수 있는 유물들이 가득한 상설 전시관 제1전시실, 그리고 서소문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보여주는 유물이 있는 제2전시실이 있다.
조선시대 사상사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보존돼 있다. (본인 촬영)
상설전시실의 다양한 유물들을 살펴보면서 기억에 남았던 메시지는 '한 사회에는 다양한 사상과 신념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기억에 남았던 메시지 (본인 촬영)
다양한 사상이 존재하기에 사회에는 필연적으로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고, 때로는 마찰과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이를 사랑과 연대로 감싸안고 서로의 자유를 보장해 줄 때, 비로소 평화로운 질서가 실현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마음을 울렸다.
'순교자의 무덤' (본인 촬영)
그리고 타인의 다른 생각이 우리를 두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자극하고 성장시키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는 메시지 역시 인상적이었다.
'경천'.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당하기 전에 썼다. (본인 촬영)
박물관을 찬찬히 둘러보며 타인의 사상, 신앙,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평화의 마음, 더 나아가 나와 다른 타인과의 공존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서소문역사공원의 '수난자 예수' (본인 촬영)
내가 박물관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한 유물을 관찰하며 지식을 쌓을 수 있고, 사색의 시간을 즐기며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과 바로 이어진 서소문역사공원에서 산책을 즐기기도 좋다. (본인 촬영)
우수 공립박물관으로 선정된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는 올해 박물관·미술관 주간의 메시지인 '분열된 세상을 하나로 잇는 박물관'이라는 주제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을 방문한 기념으로, 가족들의 세례명을 상징하는 캐릭터 기념품도 하나씩 구입했다. (본인 촬영)
5월 한 달 내내 진행되는 박물관·미술관 주간이니, 이번 기회에 가까운 박물관과 미술관을 방문해 보고 나를 위한 사유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추천한다.
☞ 2026 박물관·미술관 주간 누리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