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공지능(AI) 경쟁이 기술 개발과 국가 전략 수립을 넘어 실제 산업에 적용하는 실행 역량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각국 정부가 AI 인프라 구축과 전문인력 양성, 산업 전환을 위한 투자를 확대하면서 AI 준비도 역시 전반적으로 높아지는 추세다. 그러나 AI 전략을 실제 생산성과 산업 경쟁력으로 연결하는 속도에서는 국가별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이 글로벌 컨설팅 기업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AI 성숙도 평가에서 최상위 그룹인 ‘AI 선도국’에 새롭게 진입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전 세계 75개 이상의 경제권을 대상으로 AI 성숙도를 분석한 ‘AI 성숙도 매트릭스 2026(The AI Maturity Matrix 2026)’ 보고서를 발표하고, 한국이 최상위 그룹인 ‘AI 선도국(AI Pioneers)’에 진입했다. 이번 평가에서 한국은 미국, 중국, 영국, 싱가포르, 캐나다, 일본과 함께 AI 선도국 그룹에 포함됐다. BCG가 2024년 첫 조사를 실시한 이후 해당 그룹에 새롭게 진입한 경제권은 한국과 일본 두 곳이다.
BCG, ‘AI 성숙도 매트릭스 2026’ 리포트 발표 (자료 제공: BCG)
BCG는 한국이 자체 AI 모델 개발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컴퓨팅 인프라와 AI 생태계 구축을 위한 대규모 공공 투자를 추진해 온 점을 주요 성과로 평가했다. 특히 한국은 스탠퍼드대학교 인간중심AI연구소(Stanford HAI)가 발표한 ‘2026 AI 인덱스(AI Index)’에서 주목할 만한 AI 모델(Notable AI Models) 개발 부문 세계 5위권에 올랐다. BCG는 이러한 성과가 한국의 AI 연구개발 역량과 기술 생태계가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분석했다.
이번 보고서는 각 경제권의 AI 성숙도를 ‘AI 노출도(Exposure)’와 ‘AI 준비도(Readiness)’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평가했다. AI 노출도는 AI 기술이 주요 산업과 일자리에 미칠 수 있는 잠재적 영향을 의미한다. AI 준비도는 각 경제권이 AI가 창출하는 기회를 실제로 활용할 수 있도록 얼마나 준비돼 있는지를 나타낸다.
BCG는 AI 준비도를 평가하기 위해 ‘ASPIRE’ 프레임워크를 활용했다. 이 프레임워크는 국가적 목표, 인재 역량, 정책·규제, 투자, 연구·혁신, 생태계 등 6개 영역을 중심으로 각국의 AI 역량과 정책 환경을 분석한다. 조사 결과 거의 모든 경제권이 AI 준비도를 구성하는 최소 한 개 영역에서 진전을 보였다.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8개 경제권은 2024년과 비교해 AI 준비도 평가에서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섰다.
BCG는 AI 전략을 수립하는 국가가 늘면서 전략의 존재 자체보다 이를 실제 역량과 산업 변화로 연결하는 실행 속도가 중요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외르크 힐데브란트(Joerg Hildebrandt) BCG 공공부문 글로벌 리더이자 보고서 공동 저자는 “올해 AI 준비도가 향상된 경제권들은 정부의 실행력이 AI 전략을 실질적인 역량으로 전환하는 핵심 요소임을 보여준다”며 “앞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경제권은 핵심 산업의 AI 전환을 가속화하는 곳이 될 것이며, 이를 위해 고급 AI 인재 확보와 민간투자 확대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제조업·물류로 확대되는 피지컬 AI…한국 산업 기반의 활용 가능성 주목
BCG는 AI 기술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의 범위도 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AI의 영향은 정보통신과 금융서비스 등 지식 기반 산업에 상대적으로 집중돼 있다. 그러나 휴머노이드 로봇과 산업 자동화 등 피지컬 AI(Physical AI)가 발전하면서 제조업과 물류, 농업 등 물리적 산업으로 적용 범위가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피지컬 AI는 AI가 로봇이나 기계, 자동화 설비 등 물리적 시스템과 결합해 실제 환경에서 작업을 수행하도록 하는 기술 분야다. 생성형 AI가 문서 작성과 정보 분석, 소프트웨어 개발 등 디지털 업무를 중심으로 활용돼 왔다면, 피지컬 AI는 생산시설과 물류 현장 등에서 실제 작업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AI의 활용 범위를 확장한다.
BCG는 특히 일본과 중국이 제조업과 산업용 로봇 분야에서 확보한 강점을 바탕으로 피지컬 AI 역량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 역시 제조업 기반과 산업 현장에 축적된 데이터, 운영 경험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산업용 AI 분야의 성장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다.
황형준 BCG 코리아 대표는 “한국이 글로벌 AI 선도국 그룹에 새롭게 진입한 것은 AI 역량과 생태계 구축에서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뤘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이제 한국 기업에 중요한 과제는 이러한 기반을 실질적인 산업 경쟁력과 비즈니스 성과로 연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제조업 기반과 산업 현장에 축적된 데이터, 운영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 이를 AI와 결합한다면 인더스트리얼 AI와 피지컬 AI 분야에서 새로운 성장 기회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 대표는 AI 전환이 기술 도입만으로 완성되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AI 전환은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핵심 업무와 조직 운영 방식을 재설계하는 과정”이라며 “한국 기업들도 AI를 현장에 빠르게 적용하고 실질적인 성과로 연결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BCG는 AI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주요 전략으로 글로벌 협력과 인프라 확충, 전문인력 확보, 민간투자 활성화를 제시했다. 우선 글로벌 파트너십을 통해 각국이 부족한 전략적 역량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AI 기술 경쟁이 모델 개발뿐 아니라 반도체와 컴퓨팅, 클라우드, 응용 서비스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진행되는 만큼 모든 역량을 독자적으로 구축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다.
보고서는 AI 주권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로 반도체, 컴퓨팅·클라우드, AI 모델, 애플리케이션 등 네 가지를 제시했다. 이들 요소를 모두 독자적으로 확보한 경제권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각국이 자체적으로 확보해야 할 역량과 글로벌 협력을 통해 조달할 역량을 구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AI 인프라의 병목 해소도 주요 과제로 꼽았다. AI 모델의 개발과 운영에 필요한 컴퓨팅 자원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전력과 네트워크 인프라가 함께 확충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AI 활용이 산업 전반으로 확대될수록 컴퓨팅 자원과 에너지 수요가 증가할 수 있어 인프라 구축과 운영에 대한 장기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전문인력 확보와 육성 역시 국가 AI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로 제시됐다. AI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고급 인재뿐 아니라 기업과 산업 현장에서 AI 기술을 실제 업무에 적용하고 운영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민간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정책 환경도 중요하다. BCG는 기업이 AI 관련 투자를 지속할 수 있도록 명확한 정책과 규제 환경을 조성하고, 연구개발과 산업 적용이 연결되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정부의 역할도 변화해야 한다고 봤다. 초기 AI 확산 단계에서는 기술 도입을 촉진하는 정책이 중요했다면, 앞으로는 AI가 일자리와 산업구조, 사회적 신뢰, 자원 수요 등에 미치는 영향을 관리하는 역할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BCG는 AI 준비도가 향상된 국가들의 사례를 통해 정책 목표와 실제 실행 역량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이번 평가에서 AI 선도국 그룹에 진입한 것은 AI 기술과 생태계 구축 측면의 성과를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있다. 다만 이러한 준비도가 산업 현장의 생산성 향상과 기업의 수익성, 새로운 사업 창출로 이어지는지는 앞으로의 실행 과정에서 확인해야 할 과제다. BCG는 한국이 보유한 제조업 경쟁력과 산업 데이터를 AI 기술에 결합하고, 인재와 인프라, 민간투자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 향후 AI 경쟁력을 높이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으로 분석했다.
‘AI 성숙도 매트릭스 2026’ 보고서 전문은 BCG 공식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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